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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2차 대전 중 유태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한 화학자가 쓴 책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었다. 예상과 달리 독일인들이 저지른 일의 잔악한 실상을 고발한다기보다는 특수한 상황에 놓인 인간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냉정하게 관찰한 보고서였다.

끝없이 희생자가 생산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어떻게 가용한 자원을 이용해 살아남고자하고 옆 사람의 불행에 눈을 감았는지, 어떤 사람들이 지배자들보다도 앞장서 희생자에게 혐오감을 표시하는지, 어떤 사람들이 뜻밖의 선의를 베풀고 어떤 사람들이 인간적인 품위를 지키는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하며 여름이 지나는 동안 그 책을 읽었다.

MBC도 이제 마지막까지 온 것 같다. 더 남은 것이 있는가?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자기 의견을 표현하는 사람을 출연 금지하는 것은, 만날 ‘김정일, 기쁨조 200명과 은밀한 데서…’ 이런 기사나 쓰고 있는 매체들이나 하는 짓인 줄 알았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가라며 갖은 핍박을 하고 실제로 상관없는 부서로 날려버리는 건, 오너가 ‘빳다’를 치고 매 값을 던지는 회사에서만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다. 민감한 아이템 금지, 불방 사태, 인사권 전횡에 맞서 ‘우리끼리라도 제작 거부를 결의해야만 하나’ 하고 비장하게 모여 있다 쓸쓸히 일터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러자 이 기회에 다 쓸어버릴 수 있었는데 아까워했다나 뭐라나. 이 괴담 앞에서 모두들 할 말을 잃었다.

출근길에 회사가 보이면 숨이 막혀온다. 이 회사가 정말 그 회사 맞나? 합격했다고 우쭐하기도 했고 힘들고도 자랑스러웠던? 모든 걸 쏟아 붓고 나서 찾아오는 뜨거운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던? 자기 일에 프로이면서도 너그럽고 재미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던 그 회사 맞나? 같은 PD로 입사한 선배들이 제작 자율성 따위 구겨버리고 후배들을 핍박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욕심을 굳이 숨기지도 않는다. 속으로 두근두근하는 걸까? 불구대천의 길을 가고 있다는 건 알겠지? 종편도 시작되고 이제 회사가 언론인의 양심이니 뭐니 같잖은 소리를 신경 쓸 일은 다시는 없을 거라고 믿고 있겠지?

 

▲ 김종우 MBC 시사교양 PD

 

9월이 온다. 어깨가 무거운 선배들이 말한다. 총알이 한 발뿐이라고. 비장하면서도 왠지 서부극이나 SF영화가 생각나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총알은 원래 한 발이 맞는 거 아닐까? 한 발뿐이라면 정말 멋지게 쏘라고 있는 거 아니겠어? 영화 ‘가타카’에서 에단 호크가 그러잖아. 유전적으로 월등한 형제와의 장거리 수영 대결. 폭풍 속 바다 한가운데 숨이 턱까지 찬 그 ‘월등한 놈’이 묻잖아. 너무 멀리 나왔어! 돌아가야 해. 너는 어떻게 나보다 약하면서 날 이길 수 있지? 에단 호크가 그러잖아. 넌 언제나 돌아갈 것만 생각하지. 나는 돌아갈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아. 그래서 내가 이길 수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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