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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세고비아’

|contsmark0|귀밑거리가 보송보송한 계집아이의 손톱에 바알갛게 물들여지길 바란던 봉숭아 꽃잎이 그만 참지 못하고 떨어져, 대신 푹신한 맨땅을 물들일 무렵, 쪽마루로 나와 애창 포크송을 발로 괴고 앉은 오빠는 집 안마당에만 그렁그렁 울릴 정도로 가만가만 기타현을 튕겼다.
|contsmark1|이탤릭체로 segovia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타였는데, 멀찌감치 떨어진 변소 칸에 신문지뭉치를 쥐고 턱을 고이고 앉아 힘을 주면서도 난 ‘세상에 저 소리보다 아름답고 그리운 소리가 있다면 어떤 소리일까?’ 그 나일론줄의 울림 속으로 매번 꿈처럼 빠져들곤 했다.
|contsmark2|뜨내기들 많아 동냥아치도 많다는 ‘장계’를 떠나와서도 그 소리를 줄곧 잊지 않고 지냈다. 어린 가슴에 꽃힌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이유없는 울렁증을 만들었고, 너무나도 착한 멜로디 로망스는 내 오른 손가락을 근질거리게 했다.
|contsmark3|이 은근한 경험은 어린 시절의 세고비아를 닮은 데가 있다. 그라나다에서 소년시절을 보낸 안드레스에게 바이올린이나 첼로는 고양이 울음소리나 천식앓는 소리로 들렸다고 한다. 피아노는 이빨을 드러낸 사각형의 괴물로 보였다나? 비록 글도 못 읽는 이들의 거친 손으로 연주되었지만, 기타만이 소박하고 시적인 울림으로 어린 안드레스의 마음을 앗아갔다.
|contsmark4|안드레스 세고비아는 1893년 2월21일 스페인 동남부 하엔의 리나레스에서 태어났다. 집안사정으로 어릴 때 백부의 집에 맡겨졌는데, 엄마가 그리워 울며 보채는 안드레스를 자상한 백부는 이런 노래로 달래곤 했다.
|contsmark5|기타는/연습이 필요치 않아/팔꿈치의 힘과/참을성이 중요해
|contsmark6|이 얼마나 단순하고 귀여운 기타송인가! 이 노래의 음절마다 기타소리를 내고 기타치는 시늉까지 하던 어린 안드레스는 방긋 웃으면서 따라하곤 했단다.
|contsmark7|그 홍안의 아이가 열 다섯에 첫 콘서트를 열게 됐다는 것은 기타를 연주회용 악기로 끌어올린 최초의 사람이자 기타로도 모든 고전음악의 연주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는(토스카니니는 세고비아가 연주하는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파르피타 2번’ 중 샤콘을 듣고, “네 샤콘이 바이올린보다 낫구나”라고 했다.)20세기 기타의 거인이 드디어 눈에 보이는 첫발을 떼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contsmark8|“내가 아주 어릴적 자고 있을 때, 근처의 기타공장에서 톱밥이 창문안으로 매일 들어왔는데, 난 그걸 마시며 자랐어요”
|contsmark9|톱밥을 마셨으나 폐병을 얻는 대신, 기타의 명인으로 성장하게 된 세고비아는 마치 연인을 뒤에서 꼭 껴안 듯 그렇게 유별나게 기타를 껴안고 연주한다. 세고비아의 기타이야기와 함께 너에게 보내는 이 한 장의 명반은 젊은 날의 세고비아가 솟아오르는 열정으로 연주한 2cd이다. sp시대를 건너 lp로 복각, 최근엔 다시 cd로 복각돼서 레코드 샵에 두문불출하고 있는데, 졸고 있는 가게주인에게 ‘젊은 날의 세고비아 주세요’ 하면 있어도 없다고 한다.
|contsmark10|그저 청록색 표지에 흰 글씨로 andres segovia가 적혀있고 붉은 색 테두리로 장식이 조금 돼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음반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기타소리가 뭐 이래?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풍부한 울림을 가진 나일론 현이 아닌 거트현을 쓰면서도 울림이 너무나도 풍부하다.
|contsmark11|그만큼 정확한 터치와 손가락 주법을 구사해야 했을 것이다. 곡의 어느 부분에서 일부러 박자를 쥐었다 놓았다 하면서도 그 흐름에 흠뻑 빠져들게 하는 솜씨가 은근히 매력적이다. 세고비아의 위대함은 바로 이런점들이다.
|contsmark12|십수년 전, 세고비아가 운명했다는 비보를 듣고 나는 장계집의 봉숭아 뜰을 생각했다. 그리고 오래도록 주인없이 나일론 현이 풀린 채 빈 방을 지켰을 세고비아 기타를 생각했다. 그리고 세고비아가 했던 말 몇 마디를 떠올렸다.
|contsmark13|“음악은 바다고 악기는 바다위의 섬과 같습니다. 기타는 그 중 가장 아름다운 섬이지요. 하지만 섬은 바다만큼 중요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섬은 바다만큼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다가 없으면 섬도 없으니까요”
|contsmark14|박지원원음방송 pd|contsmark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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