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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가 100일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연일 ‘과거사’ 논란으로 시끄럽다. ‘사법살인’ 인혁당 사건, 정수장학회 재산 강탈, 고(故) 장준하의 의문사까지.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유신정권 아래서  자행된 폭압에서 어느 것 하나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최근 인혁당 사건에 대한 발언으로 박 후보의 역사인식은 또다시 검증대에 올랐다.

지금은 방송 편성에서 사라졌지만 5~10년 전 제작된 수십 편의 현대사 다큐멘터리들은 유신의 잔혹상을 말하고 있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와의 만남이며 현재를 비추는 거울’(E.H. Car)이라고 하듯 현재에 발을 딛고 서 있는 박 후보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소통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PD저널>은 최근 박근혜 후보를 둘러싸고 논란이 된 과거사 문제를 조명한 다큐멘터리를 정리해 봤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날개가 꺾인 시사프로그램의 빈 자리가 대선을 앞둔 지금 아쉬울 따름이다. <편집자>

■ KBS 〈인물현대사〉 ‘장준하 2부작’ (연출 양승동·전우성, 방송 2004년 1월 9일, 16일)

▲ 고 장준하 선생
유신정권을 이야기하며 빼놓을 수 없는 인물, 박정희의 천적이자 정직 청렴 카리스마의 정치인으로 불리는 인물이 바로 ‘장준하’다.

지난 2004년 KBS 〈인물현대사〉는 두 차례에 걸쳐 고 장준하 선생을 이야기했다. ‘장준하 2부작’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사람이지만, 그동안 의문사의 그늘에 가려 참 모습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장준하’의 삶을 조명했다.

‘장준하’의 일생은 우리 민족의 독립과 민주화 그리고 통일을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일제하에서 광복군에 들어가기 위해 학도병으로 지원했고, 해방 후 김구 일행과 함께 귀국, 김구의 비서로 있으면서 남북분단에 반대하는 활동을 했다.

그리고 50년대에 그가 발행한 비판적 월간지 ‘사상계’는 4.19혁명의 기폭제가 되었고 당시 대중들에게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정신을 일깨우고 학생·지식인 계층에게는 행동하는 양심의 불길을 당겼다. ‘장준하’는 60~70년대엔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서다, 75년 8월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제작진은 1부 ‘민족주의자의 길’에서 학도병으로 끌려간 일본군에서 탈출,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의 광복군에 합류하기까지 ‘장준하’가 걸었던 ‘6000리 대장정’을 장남 장호권씨 그리고 그의 두 딸과 함께 직접 답사했다.

2부 ‘거사와 죽음의 진실’은 ‘장준하’의 죽음과 관련해서 그가 죽음을 전후로 모종의 거사를 준비했었으며, 그것이 그의 의문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증언에 대해 밝혀 본다. 또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입수한 중앙정보부의 ‘장준하’에 대한 관찰기록인 ‘위해분자관찰보고계획서’가 당시 방송 최초로 공개했다.

■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재야인사 장준하의 죽음’ ‘유골은 무엇을 말하는가’
(연출 홍순철 ·김규형 방송 1993년 3월 14일·28일, 2012년 9월 1일)

2012년 8월 31일, 고 장준하 선생의 유골이 세상 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유골에는 두 개의 뚜렷한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두개골 오른쪽에 자리 잡은 정원형의 함몰과 오른쪽 엉덩이뼈의 골절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 인해 장준하 선생의 죽음이 타살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사실 〈그것이 알고 싶다〉는 지난 1993년에도 ‘재야인사 장준하의 죽음’이란 제목으로 ‘장준하’ 죽음의 의문을 2부에 걸쳐 파헤쳤다. 제작진은 70년대 중반의 정치·사회적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장준하 선생의 죽음이 어떠한 배경에서 발생했는지를 조명했다. 제작진은 사건 발생 직전에 추진했던 ‘거사’란 어떤 것인지, 당시 싱가포르에 거주한 장 선생의 장남과의 인터뷰를 시도했다. 특히 최초로 사건을 기사화한 당시 〈동아일보〉 의정부주재 장봉진 기자와 백기완씨 등이 출연해 장준하 죽음의 상황을 설명했다.

또한 당시 제작진은 유족 측의 부탁을 받고 장준하 선생의 시신을 검시했던 조철구씨로부터 18년만에 “그의 사인은 오른쪽 귀 뒤 급소에 망치로 친 듯한 동그란 함몰상”이라는 증언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조철구씨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의혹에 대해 조사할 수밖에 없었다. 실질적인 증거가 부족했다. 그런 제작진 앞에 장준하 선생의 유골이 나타났다.

20여년 만에 또다시 제작진은 카메라를 들었다. 지난 9월 1일 방송된 ‘유골은 무엇을 말하는가’ 편에서는 장준하 선생의 유골을 통해 의문사 의혹을 제기했다. 1993년 방송에서 밝혀진 ‘동그란 함몰상’이 유골을 통해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제작진은 이번에 발견된 유골과 1975년 당시 사체 검안의의 소견서, 추락 지점의 지형 등을 토대로 국내외 법의학자, 신경외과 전문의 등 총 29인의 자문을 바탕으로 사망 경위에 대한 입체 분석을 시도했다. 

▲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유골은 무엇을 말하는가’편에서는 지난 8월 31일 세상에 나온 고 장준하 선생 두개골을 조사했다. ⓒSBS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잊혀진 죽음들-인혁당 사건’ (연출 한철수, 방송 1999년 10월 24일)

유신정권이 남긴 우리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오명과 슬픔은 ‘장준하’ 의문사뿐만이 아니다. 국제법학자협회는 1975년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바로 인혁당 사건으로 8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날이다.

지난 1999년 10월 24일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잊혀진 죽음들-인혁당 사건’편을 통해 ‘인혁당’ 사건을 재조명했다. 제작진은 당시 피해자 가족과 사건 관계자들의 생생한 증언과 사건 관련 정부관계자들의 인터뷰 및 다각도의 사실확인 작업을 통해 인혁당 사건의 진실을 파헤쳤다.

서도원, 도예종, 우홍선, 하재완, 김용원, 송상진, 여정남, 이수병은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에 처해졌고 그 유가족들은 간첩의 가족이라는 멍에를 안고 사회의 냉대를 받으며 고통의 삶을 살았다. 1964년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하던 학생들을 배후 조종했다는 이유로 ‘인혁당’은 검찰에 기소됐지만 증거물이 없다는 이유로 공소를 기각한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974년 ‘인혁당 재건위’라는 2차 인혁당 사건이 발표된다. 당시 유신반대운동을 하던 ‘민청학련’을 ‘인혁당 재건위’가 조종했다는 것이다. 이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관련자들을 모두 풀려났으나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 중 8명은 사형 집행을 당했다. 그것도 대법원의 형선고 발표 20시간 만에 말이다. 공안 관련 사범이라고 해도 사형선고 이후 적어도 3, 4년은 집행을 미루는 관행에 비하면 이례적인 형집행이었다.

▲ 재판을 받고 있는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들

■ MBC〈이제는 말할 수 있다〉‘8인의 사형수와 푸른 눈의 투사들’ (연출 김환균, 방송 2005년 4월3일)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 8명이 사형에 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던 외국인이 있었다. 2005년 방송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8인의 사형수와 푸른 눈의 투사들’편에서는 당시 ‘인혁당’ 관계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인혁당 구명운동에 앞장섰던 외국인들의 시각에서 인혁당 사건을 재조명했다. 또한 제작진은 인혁당 사건이 냉전이라는 소리 없는 전쟁의 타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당시 영종도에서 선교활동을 벌이던 시노트 신부(James Sinnott)는 CIA 요원으로 있던 닐 도허티(Neil Doherty)로부터 “학생 운동, 노동 운동 등 정부에 반하는 세력들 모두에게 죄를 씌울 무언가가 짜 맞춰질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74년 4월 3일,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반유신 시위가 일어나게 된다.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이다.

시노트 신부는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도허티가 예고한 사건임을 알고, 사건의 조작을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또한 인혁당 관계자 가족들로부터 사건의 억울함에 대해 듣게 된 조지 오글(George Ogle) 목사도 본격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사건의 진상을 조사한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혁당 관계자 등 여덟 명은 성급하게 처형되고 말았다. 인혁당 사건을 최초로 공론화한 조지 오글 목사와 가장 활발히 사건을 알렸던 시노트 신부도 한국 정부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았다.

▲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8인의 사형수와 푸른 눈의 투사들’ ⓒMBC

■ KBS 〈인물현대사〉 ‘내가 죽는 이유는 민족민주운동을 한 것 뿐이다-이수병’
(연출 박진범, 방송 2005년 4월 1일)

지난 2005년 방송된 KBS 〈인물현대사〉 ‘내가 죽는 이유는 민족민주운동을 한 것 뿐이다-이수병’편에서는 격동의 시대, 극한적 반공이데올로기라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혁신운동의 명맥을 유지해온 이수병을 조명했다.

취재진은 당시 사형집행 기록을 입수, 최초로 공개했다. 사형집행 명령부에는 당시 집행자와 입회자의 이름과 사형집행에 걸린 시간, 이수병의 최후 진술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취재진은 사형집행부의 기록을 추적하여 당시 입회목사인 박정일 목사를 어렵게 만나 사형집행 당시의 상황을 들어봤다.

제작진은 이수병의 행로를 통해 광복 이후부터 70년대까지 우리 현대사에서 혁신계 세력의 이상과 노선, 그리고 그들의 한계와 좌절을 이야기했다.

▲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 故 이수병 ⓒKBS

■ KBS 〈인물현대사〉‘진실은 감옥에 가두어 둘 수 없다-조영래’ (연출 황대준, 방송 2003년 7월25일)

인혁당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 가운데는 故 조영래 변호사가 있다. 80년대 민주화, 인권운동의 또 다른 상징으로 불리는 조영래 변호사는 인권의 이름으로 파렴치한 시대를 질타하며, 부도덕한 권력에 맞서 싸운 운동가다.

2003년 방영된 KBS 〈인물현대사〉 ‘진실은 감옥에 가두어 둘 수 없다-조영래’편은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한 ‘시대의 양심’ 조영래 변호사를 다뤘다.

서울대 수석합격에서 내란음모사건 구속, 민청학련사건으로 6년간 수배, 전태일평전 출간, 망원동 수재민 소송에서 성고문사건의 권인숙 변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창립 등에 이르기까지 그의 한결같은 걸음은 우리시대 민주화, 인권운동의 자화상인 셈이다. 제작진은 “조영래 변호사를 들여다보면 그가 살다간 70~80년대의 폭압적 본질이 낱낱이 드러난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민주화란 권력자의 선의로 주어지는 하사품이 아니다, 우리가 잠들지 않는 한 아무도 우리의 앞길을 막을 수 없다’는 소신으로 부도덕한 권력에 정면으로 항변했다. 제작진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권리와 민주화를 향한 그의 실천적인 삶을 ‘법을 배운 전태일’로 표현하며 80년대를 재조명했다.

▲ 故 조영래 변호사 ⓒKBS

■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장도영과 5·16’ (연출 한홍석, 방송 2001년 5월 11일)

‘과거사’ 쟁점 중 하나인 유신정권. 유신정권의 시작인 ‘5·16 쿠데타’, 그리고 5·16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장도영이 있다. 2001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장도영과 5·16’편을 통해 5·16 당시 계엄사령관이자 혁명최고회의 의장이었던 장도영을 최초로 단독 인터뷰하고 주변을 취재해 5·16의 미스터리를 추적했다.

제작진은 수녀원에 피신했던 장면 총리가 미국의 쿠데타 진압을 직접 공개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란군을 진압할 수 없었다는 일반인들의 인식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5·16의 징후를 장도영 당시 참모총장이 몰랐는지 의문을 가진 제작진은 여러 명의 증언자들을 통해 장도영이 박정희와의 친근한 인간관계 때문에 쿠데타를 알고도 묵인했다고 주장한다. 장도영은 여순반란사건 때 군대에서 쫓겨난 박정희를 복직시켜 준 인연이 있다.

▲ 5·16 당시 계엄사령관이자 혁명최고회의 의장이었던 장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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