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듀서의 책읽기 "자유냐 죽음이냐"
상태바
프로듀서의 책읽기 "자유냐 죽음이냐"
자유를 위해 싸우는 거인
  • 승인 2002.01.1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contsmark0|요즘처럼 ‘자유’라는 말이 많이 쓰이면서 또 부담스럽게 다가오는 때도 드문 것 같다. 눈에 보이는 개인의 자유는 과거에 비해 크게 신장되었고, pd들의 제작환경에 있어서도 물리적인 강제와 구속은 사라진 듯싶다. 그러나 왜 아직도 자유를 갈망하는가?
|contsmark1|지난해 시작된 에서 처음으로 소개한 책 중 하나가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였다. 취재 당시 만난 청년들은 80년대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를 말했다. 특히 경제적 자유를 강조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야말로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contsmark2|이제 자유는 함께 이루어나가야 할 가치가 아니라 개인의 능력에 따른 결과물처럼 비쳐진다. 하긴 70∼80년대 추구했던 정치적 자유가 개인의 자유 - 성적인 자유를 포함해 - 를 보장해주지 못하고 오히려 개인의 피와 희생만을 요구했다고 느낀다면, 어느 누가 쉽게 ‘마이홈주의’와 ‘프리바토피아’(사유화된 유토피아)를 허위의식일 뿐이라고 폄하할 수 있을까?
|contsmark3|한국의 근·현대사를 통하여 공공의 자유를 위해 흘린 피의 대가가 아직도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전제와 압제에 빌붙어온 지배층들이 아직도 서슬 퍼렇게 살아있는데, 누가 자신 있게 ‘자유를 위해 쏟은 피’야말로 진정 값어치가 있다고 노래할 수 있을까?
|contsmark4|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유냐 죽음이냐’는 저자의 고향 크레타 섬을 무대로 삼아, 터키의 지배를 받고 있는 그리스계 기독교인들의 지도자 미칼레스 대장을 중심으로 자유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contsmark5|이곳에는 그리스계와 터키계 주민 사이에 충돌이 끊이지 않아 양측에는 수많은 원한이 켜켜이 쌓여있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계 주민의 지도자 미칼레스가 터키계 장군 누리와 나눈 우정과 원한, 누리의 아내에 대한 열정, 충동적인 행동과 욕망, 조국애, 자유에 대한 갈망을 그리고 있다.
|contsmark6|어느 날 주인공 미칼레스는 어릴 때 친구였으나 지금은 적대적인 관계에 놓인 터키계 누리 장관의 초대를 받고 그의 집으로 간다. 거기서 미칼레스는 매혹적인 누리장관의 아내를 보고 격정적인 감정을 억누를 수 없게 된다.
|contsmark7|한편 미칼레스의 형과 누리장관은 결투를 벌이고, 이를 계기로 양쪽 주민의 잔혹한 학살극은 시작되는데, 점령자의 위치에 있는 터키계가 압도적인 우위에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그리스계 주민들은 또다시 목숨을 건 항쟁을 준비한다.
|contsmark8|크레타인에게 자유는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무엇은 아니다. 그것은 근원적인 것, 죽음도 넘어서는 몸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것. 죽음을 눈앞에 둔 문맹자 노인이 뒤늦게 글을 배운 뒤 처음으로 쓴 문장은 ‘자유 아니면 죽음’이었다.
|contsmark9|주인공 미칼레스도 이 자유를 위해 기꺼이 사랑해마지않던 고향의 냄새와 바다 바람, 평화로운 가정과 흠뻑 빠지고 싶은 여인, 오래된 친구들과 나누던 술과 음식, 그리고 무엇보다 삶에의 의지마저 버려버린다.
|contsmark10|물론 지나친 ‘사나이’(마초)에 대한 강조가 거슬리기도 하지만 이것이 단순히 한 영웅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저자는 영혼과 육체, 거인스러움, 사랑과 질투, 죽음과 삶이라는 심오한 주제들을 종교와 사상을 넘나들며 다양한 등장인물들 속에 잘 녹여내고 있다. 이를 통해 저자는 우리가 ‘벌레가 아니고 진정으로 거인이었음’을 상기시킨다.
|contsmark11|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남자였어. 그들은 우리처럼 벌레가 아니고 진정으로 거인들이었지. 그리고 그때의 여자들도 마찬가지였어. 그렇다. 더욱 용감했었다. 아, 세월, 세월이여! 우리는 굴러 떨어지고 있다. 지옥으로 가고 있다. (자유냐 죽음이냐 中)
|contsmark12|매일 아침 나는 출근하자마자 시청률 표에 눈이 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보이지 않는 부가가치가 계량화된 성적표. 이 앞에서 점점 작아지는 프로듀서의 자존심. 경력이 쌓이면 그에 따라 아이템의 선택부터 예산, 스텝의 선택에 있어서도 자율성이 확대된다고 결코 말할 수 없는 현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과의 괴리. 혹시 우리는 이 속에서 ‘벌레’로 사는 것이 아닐까?
|contsmark13|‘신자유주의’ 시대. 이 모든 경제질서의 궁극적 토대는 사실상 실업과 임시고용, 그리고 그것이 내포하는 해고 위협이라는 구조적 폭력이다.(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나기, 피에르 부르디외, 프리바토피아를 넘어서 中)
|contsmark14|외주 비율과 비정규직의 증가, 연봉제의 확대, 예산을 통한 통제, 시청률에 의한 평가 등은 ‘공공의 자유와 이익’보다는 ‘광고주와 경영진의 이해’에 따라 방송계가 움직여질 위험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자유가 자유를 억누르는 개념의 전복. 보이지 않는 강제. 상상력과 창의력의 바탕인 ‘자유’야말로 프로듀서의 생명이지 않을까? 90년대를 지나 21세기를 달려가는 지금도 카잔차키스의 ‘자유냐 죽음이냐’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contsmark15|이도경 kbs 기획제작국 pd |contsmark16|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