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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상처, 마주해야 극복할 수 있어”

[인터뷰] 영화 ‘남영동 1985’ 정지영 감독 최영주 기자l승인2012.11.14 17:5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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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가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는 20여 일에 걸쳐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펼쳐졌다. 고문, 고문, 그리고 고문.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배후조종 혐의로 체포된 고(故) 김근태 의원은 고문으로 인한 상처로 평생 후유증에 시달렸다. 1985년 가을은 치유되지 못한 상처가 되어 2012년에도 또렷이 남았다.

정지영 감독은 2011년 〈부러진 화살〉로 부조리한 사법현실을 고발하더니 이번엔 어두운 과거사를 고백했다. 정 감독은 〈남영동 1985〉에서 현대사의 곪아버린 상처를 끄집어내 관객들에게 눈 앞에 펼쳐 놓았다. 왜 고문이었는지, 고문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지난 9일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정지영 감독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영화 〈남영동 1985〉의 정지영 감독 ⓒ호호호비치

〈남영동 1985〉의 시작은 2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 감독은 1988년 발표된 임철우의 소설 ‘붉은 방’을 본 후 고문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졌다고 했다. ‘붉은 방’은 집안에서는 성실한 가장이자 아빠인 한 고문경찰관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붉은 방’에서 영감을 얻은 정 감독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소재로 하는 픽션을 구상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고문기술자인 줄 모르고 행방을 찾아다니는 딸과 친구의 복수를 위해 이근안을 쫒는 남자가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물론 둘은 서로의 사정을 모른다. 이것을 모티브로 태어난 이야기가 천운영 작가의 소설 ‘생강’이다.

“읽어보니 내가 영화로 잘 만들 수 있는 내용이 아니고 박찬욱이 잘 할 수 있는 내용이었죠. 나는 안 되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부러진 화살〉 개봉을 앞두고 김근태 의원이 돌아가셨어요. 자연스레 김 의원에게 관심을 갖고 그의 수기를 봤더니 고문 이야기가 있었죠. 그래서 ‘아, 바로 이거다’ 했어요.”

그렇게 지금의 〈남영동 1985〉가 탄생했다. 물론 이 영화가 ‘정치의 계절’인 대선을 앞두고 민감한 주제를 갖고 나타난 것은 분명하지만 ‘정치 영화’라 말할 수 없다. 정 감독은 〈남영동 1985〉가 “인권에 관한 영화”라고 설명했다. 그는 “인간이 인간에게 하는 가혹 행위가 한 사람의 영혼과 육체를 망가뜨릴 수 있다”며 “〈남영동 1985〉는 인간의 잔혹한 행위를 고발함으로써 그것이 우리들에게 어떠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그린 영화”라고 설명했다.

   
▲ 영화 〈남영동 1985〉 포스터 ⓒ공식사이트
실제로 〈남영동 1985〉는 영화의 80% 이상이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이뤄지는 고문 장면으로 채워졌다. 주인공 김종태 역을 맡은 배우 박원상은 실제 고문을 받는 듯 실감나게 피해자의 모습을 그려냈다. 〈부러진 화살〉에서 정 감독과 일한 바 있는 박원상은 이번에도 정 감독을 믿고 따랐다. 정 감독은 “기대 이상”이라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만족감만큼이나 후유증도 컸다. 정 감독은 “영화 인생 30년 동안 가장 힘들었다. 영화 끝나고도 한 달 동안 아팠다”며 “박원상도 가장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 속에서 눈길을 끄는 또 다른 인물이 있다. 바로 인간이라서 인간적이지 못한 고문기술자 이두한(이경영 분)이다. 정 감독은 영화 속 이두한이 잔인하게 누군가를 고문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고문은 본능이 아니라 동물과 다른 인간의 지능이 만드는 거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애국자라고 칭송하게 되면 나중에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그렇게 만드는 거죠. 그래서 사실은 그(이두한)도 피해자라는 거죠. 정치적 이념이든, 어떤 조직 속에서의 문제든 그런 것들이 이두한을 고문기술자로 만들었죠. 그러니까 이런 문제를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이두한 한 사람뿐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시종일관 자행되는 고문장면과 김종태가 고문에 못 이겨 생존 본능에 몸을 맡긴 채 거짓 자백을 하는 모습은 눈뜨고 보기 힘들만큼 참담하다. 이런 불편한 장면을 마주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장 감독은 “어렵게 얻어낸 민주주의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 감독은 “이렇게 아프고 고통스럽게 얻어낸 민주주의가 최근 여러 가지 사건으로 훼손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관계없다며 외면하고 있다”며 “피부로 못 느낀다고 내팽개치는 상황이 안타까웠고 이 영화를 보며 함께 아파하면 억울해서라도 민주주의를 지켜낼 것 같았다”고 밝혔다.

“아픈 진실을 외면하면 그냥 썩은 채 굳어요. 고문 피해자들은 트라우마를 없애기 위해 치료를 받죠. 역사도 마찬가지예요. 역사의 아픈 상처를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고 덮어버리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덮은 채로 상처가 퍼져나가게 되죠. 병든 무의식을 가지고 역사가 이어지는 것은 대한민국의 불행이죠. 꺼내고 까발려서 마주하고 극복해야지만 그것이 진정한 극복이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남영동 1985〉를 비롯해 〈26년〉, 〈MB의 추억〉 등 최근 영화계에 현실과 과거사를 다루는 이야기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그러나 침묵한 TV에 대해 그는 안타까운 심경을 전하기도 했다. 정 감독은 “언론의 하나인 TV가 권력에 장악당해서 영화계가 자꾸 현실과 과거를 비판하는 영화를 내놓는 것”이라며 “빨리 언론이 제자리를 찾아서 영화는 가끔씩 언론이 못하고 있는 것, 버리고 있는 걸 찾아서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 감독은 “언론이 장악당한 이유는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이라고 말했다. 권력을 가진 자가 권력을 오래 지속시키고 싶고 자신의 잘못과 죄를 덮고 싶은 욕심 때문인 것이다. 정 감독은 “우리가 염려해야 하는 건 자본에 잠식당한 언론이지, 정치권력에 장악당한 언론이라는 건 말이 안 되는 시대”라며 “정치권력이 언론을 장악하고 있는 현재 상황은 코미디”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 감독은 1980년대의 상황이 2012년에도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서슬퍼런 검역이 마구 칼을 휘두를 때”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블랙코미디같은 2012년의 ‘남영동’을 정 감독은 지금의 ‘MBC’에 비유하기도 했다.

   
▲ 영화 〈남영동 1985〉의 정지영 감독 ⓒ호호호비치

“물리적인 형태로 드러나진 않더라도 지금 MBC의 형국이 남영동 아닌가요. 막무가내인 한 친구가 소중한 사람들의 능력과 그들의 삶과 생각과 세계관을 막 짓누르면서 횡포를 부리고 있는 형국이죠.”

정 감독이 관객들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그는 “제발 보고 나서 어떤 아픔과 슬픔을 공유했다면 혼자만 가지지 말고 주위 사람들에게 권유하라”며 “함께 아파하고 함께 슬퍼하자”고 전했다.

지금도 어딘가에 다른 형태로 ‘남영동’이 존재하고 ‘1985’년은 계속되고 있다. 제2의 김종태가 제2의 이두한으로부터 받은 고문의 상처를 끌어안고 힘겹게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썩어가고 있는 상처를 도려내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 감독은 1년을 쉬고 난 후 자신만의 세계관과 철학을 담은 영화를 만들 계획이다. 이번에는 또 어느 누구의, 혹은 어느 역사의 썩은 상처를 도려내고 관객에게 함께 아파하자고 이야기할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최영주 기자  yj719@pd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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