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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론사건과 미국의 위기

|contsmark0|동아시아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크루그먼은 ‘끼리끼리 자본주의’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아는 놈들끼리 해먹다가 망했다는 것이다. 작년도 노벨상 수상자인 스티글리츠가 한마디 했다. “미국은 뭐 조금 나은 줄 아나 보지?”
|contsmark1|엔론사건이 터지고 한달쯤 뒤 크루그먼은 “미국도 끼리끼리 자본주의(crony capitalism, usa)”라는 글을 뉴욕타임즈(1.16)에 기고했다. 그리고 또 얼마가 지난 뒤 그는 9.11테러보다 엔론사건이 더 근본적으로 세상을 뒤집을 일이라고 단언했다.
|contsmark2|그렇다. 엔론사건은 미국식 시장경제, 이른바 글로벌 스탠다드의 허구를 간명하게, 그것도 단순한 삽화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뿌리채 드러낸 사건이다. 나아가서 시장경제란 고여 있는 물과 같아서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금방 썩어버리는, 따라서 끊임없이 정화해야 하는 여느 제도와 다름 없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contsmark3|엔론은 에너지거래 회사이고 또한 파생상품을 다루는 선물(先物) 전문 회사이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엔론이 헷지펀드에 가까운 회사라고 규정했다. 에너지 부문의 파생상품을 취급한다는 것은 곧 정부의 규제가 회사의 사활을 좌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contsmark4|에너지 부문은 전통적으로 정부가 통제하는 산업이고 선물시장 역시 정부의 규제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1986년 매출액 76억 달러에서 2000년 1010억 달러로 급성장한 이 회사의 뒤에 부시가문이 있었다. 아버지 부시의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인 1992년의 “에너지 정책법”은 엔론의 에너지거래를 가능하도록 했고 웬디 그램이 위원장으로 있던 선물거래위원회는 에너지파생상품의 규제를 풀어줬다.
|contsmark5|흔히 관료들이 규제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고 또 돈을 번다고 하지만 규제완화야말로 정치가들과 기업이 만나는 중요한 통로였던 것이다. 엔론의 창업자 케네스 엔론이 부시가문에 돈을 싸다 바친 건 당연해 보인다. 지금 미 의회는 이 ‘케니보이(부시가문에서 통하는 엔론의 애칭)’가 현 정부의 에너지 정책 수립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조사하고 있다.
|contsmark6|경제학자들은 ‘끼리끼리 자본주의’에 대한 처방전에 시장이라는 두 글자를 써 넣었다. 그런데 왜 미국 7위의 기업 엔론이 파산할 때까지 시장의 감시 기능은 작동하지 않았던 것일까?
|contsmark7|엔론은 한국의 재벌과 같은 문어발식 사업을 하면서 제휴관계에 있는 비상장기업에 손실을 몰아 놓는 방법으로 자사의 주가를 올렸다. 대우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엉터리 회계인 것이다.
|contsmark8|감사를 맡은 세계적인 회계법인 아더 앤더슨이 여기에 협력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앤더슨은 주요 서류를 파기해 버렸다. 이 회사는 엔론의 경영자문(컨설팅)까지 맡고 있었다. 단순방조가 아닌 것이다.
|contsmark9|뿐만 아니다. 이른바 401k에 따라 우리의 퇴직금에 해당하는 연금을 모두 자사 주식을 매입하는 데 쏟아부은 노동자들은 주가가 1/100로 떨어질 때까지 그저 바라보아야 했다. 주식 매입 때 회사의 보조를 받은 경우 회사를 떠날 때까지 팔지 못한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contsmark10|반면 간부들은 7, 8월 경에 주식을 팔아 거액을 챙겼고 그들 중 일부는 노동자들이 무더기로 해고되던 12월에 최대 500만 달러에 이르는 보너스까지 챙겼다. 정부, 회계법인처럼 시장(정확히 얘기하면 기업)의 감시자가 되어야 할 기관이 한 통속이 돼 버린 결과이다.
|contsmark11|미국 전체로 쳐서 2조 달러에 이르는 연금 주식(이것이 90년대 미국 증시 활황의 주요 원천이다)에 돈을 댄 노동자는 그에 걸맞은 권리를 전혀 가지지 못했다. 경제학과 언론의 유행어가 돼 버린 기업지배구조, 우리가 본뜨려고 애썼던 미국형 ‘글로벌 스탠다드’가 완전한 실패를 고한 것이다. 문제는 더 심각하다. 전쟁분위기 속에서 미국의 내부 문제는 눈에 덮힌 쓰레기처럼 모두 묻혀 버리고 있다.
|contsmark12|부시로서는 ‘악의 축’을 최대한 많이, 그리고 지속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만큼 종양은 심각해질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기는 우리 언론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아직도 문제만 생기면 미국, 그리고 시장을 찾으니 말이다. 하기는 ‘악의 축’도 열렬히 환영하는 판에 뭐가 문제랴.
|contsmark13|정태인시사평론가·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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