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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살리기

|contsmark0|방송을 시작하면서 작가와 관계를 놓고 적지 않은 갈등을 했다. 업무에 관한 고민이 아니라,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작가와 보내면서 생기는 순전히 부수적인 갈등이었다. 남의 눈을 무지하게 의식했던 결혼 초기였던 터라, 거의 매일 밥 두끼를 같이 먹고 한 책상에서 얼굴을 맞대며 생활하는 작업장 파트너가 여간 불편스럽지 않았다. 작가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contsmark1|방송사의 pd와 작가만큼 정신적 교감이 친밀한 직종은 드물 것이다. 단순히 지적인 교류 뿐만 아니라 감성의 공유도 요구되기 때문이다. ‘공생관계’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린다.
|contsmark2|작가들의 불만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 글을 쓰던 역할에서 최근에는 회의내용정리, 홍보문안 작성은 물론이고 자막정리와 tc작성 같은 허드렛일까지 해야한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시사고발프로그램에서 잠입취재를 하는 작가도 있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것뿐 아니라 많은 작가들이 정체성에 대해서도 혼란을 겪는다고 한다.
|contsmark3|imf이후 방송사의 인력축소로 인한 부담을 상당부분 작가들이 떠맡게 되었다는 지적은 정확하다.
|contsmark4|그러나 다른 분석도 가능하다. 작가들의 업무증가는 곧 작가의 활동영역 확대인 것이다. 기획회의에 참석해서 방송의 제작방향을 결정하고, 때때로 촬영현장에 나가서 원고에 충실한 녹화가 되도록 자문하는 일은 허드렛 일이 아니다.
|contsmark5|프로그램 제작 과정에서 증가하는 작가의 책임만큼 권한도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pd들이 6mm촬영까지 직접하는 것도 같은 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지적인 작업이면서도 감성적 창조활동인 방송에서는 주요업무와 보조업무의 구분이 불명확하다. 예를 들어 자막정리는 단순히 물리적인 작업이 아니라 방송 메세지의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창작행위인 것이다.
|contsmark6|따라서 작가의 업무증가 자체를 정체성 혼란과 결부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방송환경의 변화를 부정하는 것은 퇴행적인 자기방어에 불과하다.
|contsmark7|문제는 업무량과 비중이 증가한데 비해 과연 적절한 처우를 받고 있느냐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작가의 역할을 방송사가 바르게 평가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대답은 자명하다. 시청률에 도움이 되는 극소수의 드라마 작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작가에 대해 수요보다 공급이 늘 초과하는 ‘풍부한 인적 요소‘로 파악한다. 방송사가 어려울 때는 그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당연히 희생을 감수해야하는 ‘외부인력’으로 간주한다. 언제든지 ‘해고’ 가능한 탄력적 노동력인 셈이다.
|contsmark8|작가의 역할확대를 숙명적 현상으로 받아들인다면, 방송사들은 작가의 가치에 대해 재평가하는 노력을 서둘러야 한다. 거기에는 당연히 작가료의 현실화와 작가들의 신분보장을 위한 작업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contsmark9|몇몇 작가를 선별해 특혜를 주는 ‘인간적인’ 처우개선 노력을 포기하고 ‘시스템적인’ 관점에서 해법을 제시해야한다. 우수한 작가를 찾으려고만 하지말고 우수한 작가를 키우려는 정성을 기울어야한다. 작가의 자질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면서도, 작가료는 수요공급의 시장논리에 맡겨 버리는 얄팍한 전술은 이제 버려야하겠다.
|contsmark10|이를 위해서는 pd가 당연히 전위부대로 나서야한다. 그것은 보수와 고용관계에서 일방적으로 희생을 감내하며 목소리를 죽여온 우리의 작업장 파트너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절인 셈이다.
|contsmark11|오기현 sbs 제작본부
|contsmark12||contsmark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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