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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세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처음 찾은 조선인 하숙촌에는 골목길이 두 갈래였다. 청년은 하숙비가 싼 오른쪽을 택했다. 그곳에서 정치학부 선배들을 만난 뒤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에게 다가섰다. 독서는 구원과도 같았고, 식민지 조선에서 겪었던 모든 모순의 안팎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시대의 물길을 알았으니 세상을 바꾸는 방법도 확연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야간학교를 열었다. 공부한 대로 가르쳤고 믿은 대로 행동에 나섰다. 해방이 왔지만 강토는 허리가 잘렸고, 그 갈라진 틈으로 상잔의 비극이 폭발했다. 1950년 6월이었다.

전쟁은 인간의 기억이 담아낼 수 없는 지옥이었다. 그는 도망자가 되었다. 청년의 장모는 사위를 찾아내라는 서북청년단의 손에 목숨을 잃었고, 그와 뜻을 같이 했던 가난하고 힘없는 벗들이 참혹하게 죽어갔다. 천만다행으로 그는 살아남은 자였다. 유학을 함께했던 친구들의 힘이었다. 3년의 참화, 그 뒤를 이은 야만의 세월... 청년은 노인이 될 때까지 직장을 가질 수 없었고, 그의 아내는 자신의 어머니를 죽게 한 남편에게 평생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아들, 딸들이 모두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지만, 그는 자식들의 신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살아내야 했던 미친 시간들이 ‘신(神)’의 부재를, 아니, 설령 그런 존재가 있다 하더라도 신의 무력함을 웅변하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그런 ‘신’을 어떻게 믿을 수 있지?”... 미리 찍어두었던 영정 사진을 건네며 노인은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얘기를 장손(長孫)에게 털어놓았다. “조선인 하숙촌에서 왼쪽 골목을 택했어야 했다”며 실소를 머금기도 했다. 노인이 세상을 버리기 보름쯤 전이었다.

노인의 손자는 몇 년 후 ‘신’에 관해 말하는 PD가 되었다. 그 후 20여 년 동안 “사랑의 하느님”을 주제로 수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었지만, 할아버지의 ‘무신론(無神論)’을 반박할 수 있는 배움을 얻지 못했다.

현대의 신학은 ‘지옥’을 공간의 개념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죄인들에게 끝없는 고통의 불길이 가해지는 곳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 선하고 정의롭고 따뜻한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깡그리 잃어버린 절망의 나락으로 지옥을 해석한다.

▲ 변승우 평화방송 PD
나의 할아버지는 그래도 생존의 호사(?)를 누렸지만, 무간지옥(無間地獄)을 가슴에 안고 죽어가야 했던 당시 수백만의 희생자들에게 종교는 어떤 이유를 댈 수 있을까? 선량한 목숨들이 가차 없는 역사의 ‘을(乙)’이 되어 쓰러져가고, 어느덧 그 기억마저 희미해질 때 ‘사랑의 하느님’은 대체 어디에서 무얼 했다고 얘기해야 할까? 모든 것을 인간의 잘못으로 돌리는 신학적 알리바이는 또 어떻게 납득해야 할까?

60여 년 전 이 즈음, 잔인한 역사의 쓰나미에 떠내려갔던 어느 청년의 물음에 대해, 그의 완강한 불신(不信)에 대해 나의 ‘신’은 여전히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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