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램제작기 EBS자연다큐멘터리 <장수말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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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벌과 함께 한 반년

|contsmark0|장수말벌을 선택한 두가지 이유
|contsmark1|해마다 거듭되는 일이지만 찍을 ‘거리(item)’를 고르는 일은 자연다큐멘터리(이하 자연다큐)제작의 모든 과정 가운데 가장 고민스러운 작업이다. 햇수로 벌써 7년 정도, 많지 않은 편수지만 꾸준히 자연다큐를 제작해오다 보니 나름대로 아이템 선정의 원칙들이 생기게 되었다.
|contsmark2|첫째, 메시지보다는 생태 우선!인간의 주관적 감정이 배제된, 자연생태 그대로를 담담하게 보여주는 것, 느낌과 해석은 전적으로 시청자 개개인에게 맡겨두는 것! 물론 이 원칙을 구체적 결과물로 만들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지만 자연다큐의 본질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는 늘 명심하고 싶다.
|contsmark3|둘째, 흥행성 보단 내용의 충실함이 먼저!자연다큐는 대개 일년에 한 두 편만 제작하기 때문에 결과에 대한 부담이 매우 클 수밖에 없다. 당연히 제작하는 입장에선 희소성을 가졌거나 시청자들이 솔깃할 만한 아이템을 찾아 헤매게 되는데 긴 안목으로 보면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 우리 앞에 펼쳐져 있을 뿐이지 어느 것이 귀하고 어느 것이 나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contsmark4|자연다큐 제작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인간과 자연이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작업’이라고 할 때, 오히려 인간들의 관심에서 소외되어 있는 이름 없고 볼품없는, 흔하게 널려 있는 생명체들에게 더 많은 조명을 비추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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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6|작년에 방송되었던 <개미>가 좀 떴기(^^;) 때문에 다음 아이템을 고르는데 무척 애를 먹었다. 고심 끝에 고른 아이템이 바로 ‘장수말벌’(정확히는 말벌)인데, 일단 위의 두 원칙에 맞기도 하고, 사회성 곤충에 대한 평소의 관심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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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8|문제는 촬영장비가 아니라 ‘보호장비’
|contsmark9|촬영장비는 기본적으로 개미 촬영 때 쓰던 것을 그대로 썼다. 가장 큰 장수말벌의 경우 크기가 대개 3.5~5.5센티미터까지 되니까 개미에 비하면 엄청(?) 큰 셈이다.메인카메라로는 digital-cam(dvw-790)과 analogue-cam (sony70-is)을 썼고, 접사렌즈 3종류(fujinon접사줌렌즈, 벨로우즈, close-up filter), 조명은 cool-light와 키노플러(형광등 이어 붙인 것)를 사용했다. 내시경 촬영도 했으나 회사장비가 워낙 골동품(!)이라 화질이 엉망이기 때문에, 벌집 내부는 결국 외피를 조금씩 뜯어내면서 촬영할 수밖에 없었다.
|contsmark10|문제는 촬영장비가 아니라 ‘보호장비’였다. 일년에도 몇 명씩 벌에 쏘여 죽는 사람이 나올 만큼 야생의 말벌들은 위험하다. 더구나 장수말벌이나 땅벌(흔히 땡삐라 부르는)은 자칫 촬영팀의 목숨까지 위협할 수 있는 존재, 촬영도 좋지만 불의의 사고를 예방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급한 대로 미군용 고어텍스 야전상의를 입고 작업을 시작해 꽤 효과가 있었다.
|contsmark11|그러나 만족도 잠시, 장수말벌보다 조금 작은 좀말벌이나 털보말벌을 찍기 시작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 지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옷과 피부 사이에 공간이 있을 경우는 벌침이 살까지 닿지 않았으나, 밀착되는 부위(구부렸을 때 엉덩이나 무릎, 팔꿈치, 어깨 등)에는 벌침이 직통으로 뚫고 들어왔다.
|contsmark12|벌집에서 몰려나오는 수백, 수천 마리 벌들이 온몸에 달라붙으면 어디를 쏠 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촬영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카메라맨이며 전문가며, 나도 벌침 세례를 받기 시작했고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서야 전문가의 도움으로 튼튼한 안전복을 만들 수 있었다.
|contsmark13|농촌에서 가축우리 두르는 데 쓰는 천막 비슷한 두꺼운 천을 이중으로 붙여서 옷을 만들었다. 다른 사람들이야 그 둔하고 무겁고 뒤뚱거리는 옷이 참을 만했지만, 촬영감독만은 예외였다. 벌집 앞에서 수시로 카메라 위치를 바꿔야 하고, 무엇보다 조리개나 줌렌즈를 섬세하게 조절해야 하는 촬영감독으로서는 그런 상태로 작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얇은 장갑을 끼고, 뷰파인더를 보기 위해 얼굴부분도 얇은 망을 써야했다. 무더운 한여름, 윙윙거리는 벌떼 속에서 꼼짝없이 웅크리고 앉아 촬영하는 일은 이만저만한 고역이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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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15|말벌이 위험하다!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지만 우리에겐 절망의 순간들이 더 많아지는 계절이었다. 여름부터 애써 찍어오던 말벌집들이 밤사이 없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신경통에 좋다는 근거 없는 소문에 동네 사람들이 몰래 떼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큰 말벌집 한 통에 30만원씩 거래된다는 얘기도 들리고, 트럭을 몰고 다니는 전문 털이꾼들까지 나타났다.
|contsmark16|촬영을 못하게 된다는 걱정보다는 몸에 좋다면 말벌집까지도 삶아 먹으려는 사람들의 추악한 이기심에 치가 떨릴 뿐이었다.사람들의 손길을 무사히 피한 말벌집들에서도 큰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contsmark17|털보말벌이나 장수말벌이 꿀벌집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양봉 농가에서는 아예 사람이 벌통 옆에 붙어 앉아서 날아오는 장수말벌들을 때려잡고 있었다.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서 먹이가 부족한 장수말벌들이 양봉집을 털러 오는 것이었고, 사람들의 원성도 그만큼 쌓여갔다. 장수말벌은 양봉 뿐 아니라 털보말벌이나 좀말벌 등 다른 말벌집들도 공격해서 애벌레를 물어갔다.
|contsmark18|생각지도 못했던 사건에 흥분하면서 열심히 찍다보니 어느덧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그 많던 말벌들은 텅 빈 집만 남겨둔 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여왕벌만 홀로 겨울잠에 들어가고 나머지 일벌들은 모두 저절로 죽는다는 전문가의 설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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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20|여름부터 늦가을까지, 짧은 만큼 아쉬움도 컸던 촬영이 모두 끝났다. 해마다 많은 추억들이 남지만 올해 경험은 유난히 짜릿(?)했다. 사람이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곤충 가운데 하나, 늘 우리 곁에 있지만 눈에 안 띄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역설적 운명을 가진 종, 지구상의 거의 모든 식물들이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게 해주는 전령사, 벌들의 한살이를 좇으며 나는 그렇게 반년을 좇아 다닌 것이다.
|contsmark21|문동현ebs 다큐팀
|contsmark22||contsmark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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