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1999년 한국전쟁 당시 충북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자행된 양민학살사건이 보도돼 전국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당시 시사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던 나도 매일 같이 노근리로 달려갔다. 늦은 밤 까지 마을을 뒤지며 당시의 비극에 대한 증언과 생존자들의 아픈 세월을 카메라에 담았다. 수소문 끝에 당시 피해자들의 시신을 매장하는데 일손을 거들었던 한 노인을 찾았다. 매장지에 동행해 목격담을 들려주십사하고 부탁했다. 밭일로 바쁘셨던 그분은 ‘최대한 짧고 빠르게’라는 단서를 달고는 어렵게 수락했다. “우리 동네 일인데…” 이러면서.

현장으로 향하던 내내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최대한 짧고 빠르게 이끌어낼 수 있는 질문을 고민해야 했다. 드디어 현장. 그런데 마침 취재를 나온 회사의 기자 선배를 만났다. 다짜고짜 질문. “저 분은 누구?” 선배의 질문에 답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전국에서 모여든 기자들이 멀찍이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선배는 자신과 함께 온 카메라기자에게 “여기 인터뷰!”하고 소리쳤다. 신속하게 카메라기자는 촬영 준비를 마쳤다. 이 모습을 본 주변의 기자들도 일단 반사적으로 모여들었고 그 기자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카메라가 노인을 향했다. 선배의 다짜고짜 인터뷰. 당황스러운 표정의 노인이 굳은 자세로 인터뷰를 당하는(?) 동안 막상 노인을 어렵사리 섭외한 우리는 한쪽에 비켜서 있어야만 했다.

▲ 노근리 양민학살이 일어난 영동군 개근철교(쌍굴) 앞에서 진행된 위령제 모습.

이제야 상황을 파악한 다른 기자들의 질문도 이어졌다. 나는 조급해졌다. 이대로 노인이 내게 허락한 ‘최대한 짧은’ 시간이 바닥날까봐. 억울함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당시 입봉 1년 ‘초짜’ PD였던 난 결과적으로 ‘업계 물정도 모르는 무례한 행동’으로 지탄받을 짓을 하고 말았다. “저, 잠시만요.”하며 노인 앞으로 끼어든 것이다. 그러자 동시다발적인 격앙된 목소리. “야, 뭐하는 짓이야!” 난 그렇게 많은 성난 눈빛과 고함을 한 몸에 받아본 적이 없었다. 욕설도 섞여 있었다. 난 뒤로 물러섰다. ‘초짜’ 혹은 후배의 비굴한 반사신경이었다.

그 어수선한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노인은 서둘러 돌아갔다. 내가 기껏 정신을 수습해 준비한 질문을 하려하자 “뭘 또 해?”하며 역정을 내셨다. 동시에 내게서 노인을 낚아챘던 선배 기자 역시 일언반구 없이 사라졌다. 오늘에야 뒤늦게 작렬하는 나의 소심한 뒤끝. ‘그때 당신들이야말로 나와 그 노인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했던 거지?’

▲ 2일 경기도 가평군 청평리 주모 씨 소유 아파트 복도에서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아들 의혹' 관련 당사자 임모 씨를 취재하려는 기자들이 몰려 있다. ⓒ노컷뉴스

열혈 기자들의 ‘열띤 취재경쟁’ 정도로 이해해야 할지도 모른다. 나 또한 ‘초짜’ 딱지를 떼고 난 후엔 업계 관행처럼 그런 종류의 열정을 부렸을 것이다. 혹은 조금은 서글픈 동료의식을 느껴야 했는지도 모른다. 매일같이 편집이 막 끝난 방송테이프를 허겁지겁 넘겨야 했을 업계의 일손 부족한 동료이었으므로. 이 정도면 나의 소심한 뒤끝은 대충 위로받을 수 있다. 다만, 여전히 맘에 걸리는 것은 돌아서는 노인의 등에서 느껴지던 그의 황망했을 마음과 ‘낚아채기’마저 불사하던 취재경쟁을 통해 과연 무엇을 얼마만큼 담아냈을까하는 의문이다.

무려 14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최근 어느 아파트 현관문에 귀를 바짝 대고 이른바 ‘벽치기’ 취재를 하는 기자들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 이 기억을 호출했다. 한 기사에 실린 사진인데 ‘벽치기’ 취재의 힘겨움이 느껴지거니와 기사에 따르면 불침번까지 선다고 한다. 그런데 나란 인간은 그 열띤 취재의 현장에서 그저 기자들을 구출해내고 싶은 마음이 앞서니 지나치게 속이 편한 업계의 부적응자인 걸까.

▲ 김한기 청주방송 PD
그 아파트는 최근 사퇴한 검찰총장의 내연녀로 지목된 임 모 여인의 거처란다. 내 기억을 호출한 기사는 <시사IN> 10월 5일자 기사 “이렇게 기다리면 ‘임 여인’은 절대 안 나온다”. 이 기사에도 내 기억에서처럼 화를 내는 기자가 등장하는데 그 상대가 임 모 여인이다. 놀라운 게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