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백년전쟁’ 막아라? 방송심의규정 개정안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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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통심의위, ‘민족의 존엄성’ 조항 신설 예정…안팎서 이견

방송통신심의위원회(위원장 박만, 이하 방심위)가 방송에서 역사적 사실이나 위인을 객관적 근거 없이 희화화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방송심의규정 개정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객관적 근거’의 범주를 놓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벌써부터 논란이 일고 있다.

특히 방심위가 지난 7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작한 <백년전쟁> ‘두 얼굴의 이승만’, ‘프레이저 보고서(1부)’를 시민방송 RTV에서 방송한 데 대해 대한민국의 정통성 위반을 이유로 법정제재인 ‘관계자 징계 및 경고’ 처분을 결정한 것의 연장선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당시 방심위원 9인 중 여권 추천 위원 6인은 <백년전쟁> 제작의 근거가 된 1948년 미국 중앙정보국(CIA) 보고서와 당시의 신문기사 등에 대해 검증되지 않은 자료라고 주장한 바 있다.

역사적 위인 ‘객관적 근거’ 없이 희화화 금지…“‘백년전쟁’ 논란 등 손쉬운 제재 위함인가”

지난 21일 열린 방심위 전체회의에 방송심의규정 개정과 관련 안건이 보고됐다. 방송심의규정 제25조의 2(민족의 존엄성)를 신설해 ‘방송은 민족의 존엄성과 긍지를 손상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방송은 일반적으로 인식된 역사적 사실 또는 위인을 객관적 근거 없이 왜곡하거나 조롱 또는 희화화하여 폄훼하지 아니하도록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 등의 내용을 포함하겠다는 내용이다.

문제는 ‘객관적 근거’의 범주에 대한 해석이 다양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당장 이날 회의에서 일부 방심위원들은 해당 조항을 신설할 경우 자칫 불필요한 논란을 부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나섰다. 야당 추천의 박경신 위원은 “방송심의규정은 방송에 나온 내용만을 놓고 심의를 하도록 해야 하는데, 객관적 근거 여부를 놓고 판단할 여지를 만들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박경신 위원은 시민방송 RTV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작한 <백년전쟁> ‘이승만의 두 얼굴’을 편성해 방심위로부터 법정제재의 중징계를 받은 것을 언급했다. 박경신 위원은 “민족문제연구소 입장에선 충분히 객관적인 근거를 토대로 <백년전쟁>을 제작했다”며 “객관적 근거 여부에 대해 제작한 쪽에서는 있다고, 반대하는 쪽에선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 민족문제연구소 제작 역사다큐 <백년전쟁-두 얼굴의 이승만>
민족문제연구소는 미국 정부문서와 미국 언론보도, <신한민보>와 CIA 비밀자료 등에 기반해 다큐를 제작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백년전쟁> 심의 당시 중징계 의견을 냈던 여권 추천 위원들은 “초대 대통령을 모욕하고 저주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왜곡했다”(엄광석 위원), “음란물만이 불법이 아니라 역사를 객관적으로 조명하지 않은 것도 유해하다”(박성희 위원) 등의 주장을 펼쳤다.

반면 야권 추천 위원들은 “(시간이 흘러) 비밀 해제된 CIA 보고서를 바탕으로 만든 다큐인 만큼, 제재를 하려면 CIA 보고서에 나오지 않은 내용을 왜곡해 보도했다는 걸 입증해야 한다”(장낙인 위원), “비밀문서와 신문에 보도된 내용 등을 바탕으로 한 다큐인 만큼 내용이 불편할지라도 공정성·객관성 위반 등의 이유로 단죄할 수 없다”(김택곤 상임위원) 등의 의견을 냈다. 미국 CIA 자료와 신문 보도 등을 ‘객관적 근거’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해석이 각기 다른 상황인 것이다.

일련의 상황이 있었던 만큼 박경신 위원은 “(신설하자는) 해당 조항은 (일반적으로) 위인으로 분류되는 이들을 조롱하거나 폄훼하는 방송에 대해 (그저) 제재를 손쉽게 하려 만들어지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박경신 위원은 “예를 들어 (성웅으로 불리는) 이순신 장군에 대해 다수의 사람들은 모르는 부정적인 내용의 자료를 새롭게 발굴해 방송으로 제작하면 제재 대상이 돼야 하는 것이냐”고 말했다.

김택곤 상임위원도 “역사는 검증을 거듭하며 통설에 대한 바로잡음을 통해 진화하는 것”이라며 “세종대왕처럼 오랜 검증을 통해 평가에 이론의 여지가 별로 없는 인물이라면 모르겠지만 계층과 세대, 성별 등에 따라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들에 대해선 어떻게 할 것이냐”고 말했다. 역사적 평가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현대사의 인물들에 대한 방송에서 ‘객관적 근거’를 둘러싼 논란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반면 여권 추천의 박만 위원장은 “(객관적 근거는) 학계에서 사료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라며 ‘객관적 근거’의 범주를 둘러싼 논란에 대한 우려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박만 위원장은 “비판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학계 등에서 인정받은) 객관적 근거가 있으면 해도 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엄광석 위원도 “통설과 상식에 근거하면 될 일”이라고 말했다.

“역사 비판, 방심위에서 제재하려는 건가”…“조항 신설 자체보단 적용 방식이 중요” 의견도

그러나 방심위는 물론 언론계 안팎에서도 해당 조항의 신설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방심위의 한 관계자는 “방송심의규정은 법·제도의 변화에 발맞춰 개정될 필요가 있지만, 25조의 2 신설은 <백년전쟁> 심의 논란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인식될 여지가 있는 게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추혜선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은 “방심위의 개정안은 오얏나무 아래서 갓 끈을 고쳐 매는 행위로밖에 안 보인다”며 “역사 비판과 관련한 논란들을 국가 제도적 차원에서 개입해 재단하려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 추 총장은 “해당 조항을 신설할 경우 그렇지 않아도 심의의 과잉이 문제되는 상황에서 제작 현장을 초토화 시키는, 즉 제작 자율성 침해가 더 넓은 차원에서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윤정주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소장은 “<백년전쟁> 심의와 같은 논란을 부를 소지가 있는 개정”이라고 지적하면서도 “종합편성채널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왜곡 보도와 같은 명백한 역사 왜곡 등에 대해 적용할 수 있는 조항이라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이어 윤 소장은 “해당 조항을 신설할 경우 심의위원들이 어떻게 이를 적용할 지 부분을 감시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방심위의 또 다른 관계자도 “정황상 ‘백년전쟁’과 같은 사안들을 겨냥한 조항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지만, 뉴라이트 진영의 역사왜곡 등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한편 방심위는 오는 27일 방송심의규정 개정안을 입안 예고하고, 내달 중 공청회와 전체회의 보고를 거쳐 내년 1월 최종 의결과 관보 게재 등의 절차를 밟을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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