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성규 PD 추모글] 선배, 잘 가요. 잘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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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규 선배, 올겨울은 유난히 추울 것 같습니다. 눈도 많이 오고요. 단단히 채비는 하고 떠나셨겠지요? 볕 환하고, 바람 따뜻해질 때까진 곁에 계실 것 같았는데…. 그래도 다행이었습니다. 선배가 떠나기 전날, 지난 12월 11일 춘천에서 열린 <시바, 인생을 던져> 개봉 특별상영회에 참석할 수 있었고, 마지막 남은 힘을 토해내듯 선배가, 늘 그랬듯이 큰 목소리로 관객들에게 인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고마웠습니다.

선배를 알고 지낸 것도 15년이나 되었네요. 이 선배, 기억나요? 1998년이었죠. 한 PC통신의 매스미디어동호회에서 선배가 ‘6mm 현장 게릴라’라는 소모임을 만들었고, 다큐멘터리의 꿈을 갖고 있던, 하지만 아무것도 몰랐던 저는 그 소모임의 열성 회원이 되어 방장인 선배를 쫓아다녔지요. 파란 화면에 깜박깜박하던 커서(cursor)는 제게 흥분과 희망의 작은 빛이었답니다. 이미 방송 프로그램 제작 10년의 경험이 있던 선배는 6mm 캠코더로 무장한 1인 제작시스템에서 저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발견했고, 그 발견에 저도 행복했습니다.

▲ 故 이성규 감독.
선배는 제게 참 든든한 사람이었어요. 1998년에 작은 디자인회사에 다니던 저는 월급을 모아서 거금 300만원을 주고 소니 VX1000이라는 6mm 캠코더를 사서 촬영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편집이 문제였죠. 그때는 지금처럼 노트북 한 대만 있으면 편집이 가능한 시대가 아니었잖아요? “나 일하는 프로덕션에 밤에 와서 편집해. 내가 봐줄게.” 마포에 있던 프로덕션인 인디컴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던 선배는 완전 초짜였던 제게 편집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줬죠, 몰래였지만요. 밤이 하얗게 새도록 편집하면 그걸 보고 선배는 이런저런 얘기를 해줬어요. “와, 느낌 좋은데?” “어, 이 사람 아이레벨이 안 맞잖아.” 트래킹쇼트 두 개를 이어붙이면 점프컷이 되버린다는 것을 배운 것도, ‘아이레벨’이 무엇인지, ‘인서트’가 무엇인지 알게 된 것도 그 마포의 사무실에서였어요. 전 얼굴이 발그레해지며 선배의 말을 경청했어요. 그때 선배가 제게 주었던 건 단순한 방송 프로그램 제작 기술이 아니라 희망이었습니다. ‘아, 다큐멘터리를 할 수 있겠구나’라는 희망 말입니다.

이 선배, 그거 알아요? 우리 참 무모했던 거, 하긴 선배가 훨씬 더 무모한 편이긴 했지만요.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만드는 방송 프로그램 제작에 신물이 나. 난 인도에 갈 거야. 가서 오랫동안 살면서 충분히 느껴지는 이야기를 담을 거야.” 당시 전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왠지 같이 가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저 회사 그만뒀어요. 같이 가도 되죠?”라는 제 말에 껄껄껄 웃던 선배 얼굴이 생각나요. 1999년 봄이었습니다.

▲ 다큐‘시바,인생을 던져’ 인도 촬영 현장에서의 故 이성규 감독.
인도에서 우리 참 고생 많이 했어요. 40도가 넘는 날씨에 에어컨 없는 차 빌려서 6~7시간씩 걸려 촬영가기(그때 선배가 그랬죠, “야, 누가 내 얼굴에 헤어드라이어 한 4대쯤 동시에 틀고 있는 것 같다”), 여름밤 시골 마을에 촬영 갔다가 모기 수백 마리에 물리면서 마당에서 잠자기(생각해보면 오싹하긴 해요, 그땐 말라리아 걱정을 전혀 못 했잖아요.). 한 번은 비하르(인도의 한 주) 주정부 청사에서 촬영하는데 한 경찰이 우리한테 “우다르 자오(저리로 가)!”하니까 선배가 그 경찰에게 “자오? ‘자이에’ 볼로!(가? ‘가세요’라고 해봐!)” 힌디는 한국어처럼 반말, 존댓말이 있잖아요. 그걸 아니까 선배가 반말하는 경찰에게 고함친 거죠. 그 경찰 움찔하더니 헛기침하면서 멀뚱멀뚱 바라만 보던 거 기억나요. 그때 선배 참 멋있어 보였어요.

지난 12월 11일, 독립PD 후배들이 춘천 강원대병원에 찾아가서 선배하고 인터뷰 촬영도 하고, 가족하고 지내는 모습도 찍고 했잖아요. 그 때 말하는 것조차 힘들어하던 선배의 모습을 찍던 제 마음이 얼마나 찢어졌는지 아세요? 전 선배가 얼마나 당당했던 사람인지,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았던 사람인지 알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선배의 힘 없는 목소리를 듣는 게 아주 쓸쓸했어요. 다른 독립PD들 마음도 다 같았을 거예요.

그 날 후배인 박혁지 PD가 와서 “저희가 지금 제작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 독일하고 공동 제작하기로 오늘 결정됐어요.” 하니까 누워있던 선배가 링거주사가 꽂혀있는 손을 들어 손뼉을 쳤어요. 그리고 “아이고, 아이고.... 그래 잘 됐다.” 눈물 글썽거리며 자기 일처럼 좋아하던 거 잊지 못할 겁니다. 고마워요. 그러고 보니 2011년에 제가 <달팽이의 별>로 암스테르담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상 받았을 때 선배가 울면서 좋아해 줬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게 이제야 생각나요. 영화제에서 돌아온 후 개봉 준비로 바쁘다는 핑계로 선배한테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 말을 이제야 해서 미안하고, 또 미안합니다.

▲ 지난 11일 춘천 CGV에서 <시바, 인생을 던져> 특별상영에서 관람객들이 비행기를 날리고 있다. 이날 참석한 이성규 감독은 독립영화 발전을 위한 관객들의 성원을 부탁했다.
선배는 의외로 눈물도 참 많은 사람이었어요. 2006년 말, 그저 ‘일개 외주PD’로 폄하되기도 하며 ‘하청업자’에 불과했던 프리랜서 PD들이 한국독립PD협회를 세우던 날도 그랬어요. 선배는 “감개무량하다”며 눈시울을 붉혔죠. 그리고 1대 협회장에 누구도 나서지 않을 때, ‘갑’인 방송사에 ‘찍힌다’며 대부분의 독립PD들이 용기를 내지 못할 때 선배는 나서줬잖아요. 선배도 엄연히 한 가정의 가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요.

협회장으로서 독립PD들의 권익을 위해 싸우면서도 선배는 <천상고원 무스탕> 같은 다큐멘터리 제작도 게을리하지 않았죠. 이제 방송사에서 저희 무시하는 일 예전보다 많이 줄었어요, 아직도 해결해야 할 것들은 쌓여있지만요. 선배가 그 앞에 계셨어요. 춘천의 장례식장에서 마지막 예를 갖추던 저희가 하염없이 흘렸던 눈물은 그런 선배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어요.

▲ 이승준 독립PD.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어요. 근데 이상해요. 집으로 돌아가는 4호선 지하철 안에서, 연말의 시끌벅적한 홍대 거리에서, 된장찌개 냄새 구수한 여의도 식당에서 자꾸만 눈물이 나요. 장례식에서 실컷 눈물을 흘렸다고 생각했는데…. 선배는 제게 생각보다 훨씬 더 소중한 사람이었나 봐요. 선배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또 만나러 가야겠어요. 19일에 개봉하는 선배의 마지막 영화 <시바, 인생을 던져>에 사람들이 선배를 기억하러 올 거예요.

또 눈이 오려나 봐요, 하늘이 잔뜩 흐려졌어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선배. 잘 가요. 잘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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