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TV 지금 TV (2) KBS <개그콘서트> SINCE 199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contsmark0|“과연 코미디 프로가 뜰 수 있을까?”모험 속에서 99년 출발했던 kbs <개그콘서트>는 몇 번의 고비도 있었지만 예상을 뒤엎고 순항하고 있다. ‘코미디 프로의 부활’을 내걸고 의욕적으로 출발했던 다른 코미디 프로들이 맥없이 쓰러지고 단명하는데도 유독 <개그콘서트>만은 승승장구하고 있는 이유는 기존 코미디와는 다른 참신함과 발상의 전환을 목표로 했던 초창기 기획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contsmark1|
|contsmark2|
여전히 매주 녹화날에는 ‘개콘’(<개그콘서트>의 애칭>)을 보러온 관객들로 장사진을 이루며, 이때만큼은 “가장 덩치가 큰 방송사인 kbs 공개홀이 왜 이렇게 작은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다. 변치 않는 인기를 얻고 있는 <개그콘서트>의 처음 기획과정은 어땠는지 박중민 pd를 만나봤다.
|contsmark3|
|contsmark4|
|contsmark5|
|contsmark6|
|contsmark7|
‘실험성’ 변치 않는 초심이 비결
|contsmark8|
|contsmark9|
|contsmark10|
|contsmark11|
4년여가 지난 지금도 초심을 잃지 않고 있는 <개그콘서트>. 변치 않은 초심은 바로 ‘실험성’이라고 박중민 pd는 자부한다. 코미디 프로에서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실험에 도전하는 것은 기획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었다.
|contsmark12|
|contsmark13|
<개그콘서트>는 대학로 연극 문화를 그 근간으로 하고 있다. <개그콘서트>라는 이름은 당시 ‘컬트삼총사’가 대학로에서 공연했던 콘서트 이름을 인용한 것이었고 형식은 백재현, 이휘재, 송은이 등 서울예전(현 서울예대) 개그동아리 ‘the play’에서 원류를 찾을 수 있다.
|contsmark14|
|contsmark15|
그러나 ‘the play’ 구성원의 대부분이 tv로 진출하는 바람에 백재현은 후에 <개그콘서트>에 합류하는 이태식, 김경희 등 신인개그맨들로 다시 팀을 꾸려 유사한 형식으로 ‘game’을 연극무대에 올리게 된다. 짧막한 에피소드 중심의 개그와 중간중간 삽입되는 신나는 음악 등 독특한 형식의 ‘game’은 당시 대학로에서 알음알음 인기를 얻고 있었다.
|contsmark16|
|contsmark17|
이런 형식이 대학로에서 여의도로 옮겨지게 된 데에는 코미디언 김미화의 역할이 컸다고 박pd는 말한다. 그녀는 이 공연을 본 후 평소 친분관계가 있던 박pd에게 공연을 같이 보러가자고 했고 박 pd는 연극을 보면서 “잘만 다듬으면 괜찮을 것”이라는 ‘feel’(?)을 받았다고 한다.
|contsmark18|
|contsmark19|
그날로 코미디의 대가들이라고 할 수 있는 박중민 pd, 전유성, 김미화, 백재현은 전유성의 집에 모여 공연 녹화 테잎을 보며 심도 깊은 토론을 벌였다. 과연 연극을 객석이 아닌 tv화면으로 보면 어떨지, 프로그램으로 만든다면 무엇이 더 첨가돼야 하는지 등 장시간에 걸친 당시 토론은 지금의 <개그콘서트>의 원형이 됐다.
|contsmark20|
|contsmark21|
|contsmark22|
|contsmark23|
|contsmark24|
‘다 바꾸자’ 발상의 전환에서 시작
|contsmark25|
|contsmark26|
|contsmark27|
그러나 당시 코미디프로그램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던 상황이었다. 당연히 코미디 프로를 시도한다는 자체가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박 pd는 “아이디어 자체는 좋았지만 처음에는 불안한 느낌이 든 것이 사실이었다”고 당시의 심정을 전했다.
|contsmark28|
|contsmark29|
정해진 대본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코미디의 발상 전환’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기획에 매달렸다. 또 연출자 개인의 독주에 의해서가 아니라 코미디에서 오랜 경력을 쌓은 김미화, 전유성 등과 머리를 맞대며 기존 코미디의 틈새를 파고 들어갔다.
|contsmark30|
|contsmark31|
또 공연분위기를 최대한 살리고, ‘코미디=장년층’이라는 틀을 탈피하기 위해 ‘신세대 댄스그룹’으로 느껴지도록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신인 개그맨들을 기용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contsmark32|
|contsmark33|
박pd는 최대한 공연장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직접 대학로의 공연장을 다니며 공연장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 무대도 만들어냈다. 볼거리를 위해서는 눈에 띄는 무대의상도 필요했다.
|contsmark34|
|contsmark35|
무대의상은 김미화가 발벗고 나섰다. 자신이 패션쇼에 출연한 적 있는 디자이너 이상봉씨가 마침 사이버 느낌이 드는 의상 패션쇼를 하던 터라 어렵지 않게 협찬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contsmark36|
|contsmark37|
이전의 코미디 프로들이 대부분 관객들의 웃음을 녹음해 내보내거나 ‘아르바이트’ 방청객을 통해 억지웃음을 유발했는데 반해, 박pd는 ‘자발적으로 공연을 즐기러 온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소라의 프로포즈> 녹화장이나 대학로 등을 다니면서 홍보에도 매달렸다.
|contsmark38|
|contsmark39|
이제는 보려는 방청객들로 넘쳐나는 상황이지만 당시는 ‘발품’을 팔아서라도 이 ‘새로운 형식의 프로그램’을 알릴 수밖에 없었던 것.
|contsmark40|
|contsmark41|
|contsmark42|
|contsmark43|
‘식지 않는 열정’ 튼튼한 버팀목
|contsmark44|
|contsmark45|
|contsmark46|
무엇보다 관객들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재미있는 내용’이 필수관건. 그들이 선택한 키워드는 ‘패러디’였다. 어디선가 다들 봤음직한 내용들을 색다른 내용으로 패러디하면 웬만한 사람이면 웃지 않고 못 배기기 때문이다.
|contsmark47|
|contsmark48|
영화, 드라마, 고등학교 교과서의 소설 등에서 한 장면을 패러디한 ‘개그’는 시청자들의 이목을 집중시겼다. 당시 개그맨들의 열정도 대단했다. 주말도 반납하고 일주일 내내 새벽까지 회의를 하면서도 즐거워하는 그들은 ‘개콘’의 탄탄한 버팀목을 만들어낸 근간이라고 박pd는 말한다. 이런 연습 덕분에 실제 녹화에서는 웬만하면 ng도 나오지 않아 방청객들의 웃음이 끊기는 ‘불상사’조차 일어난 적이 드물다고 한다.
|contsmark49|
|contsmark50|
돈독한 팀웍을 자랑하는 <개그콘서트>팀들은 달리 회의랄 것도 없이 만나서 얘기하는 것 자체가 회의였다.
|contsmark51|
|contsmark52|
당시 유행어가 됐던 김영철의 ‘네, 네 안녕하십니까’도 대화 도중 김영철이 무심코 “114안내원 말투가 특이하다”며 말을 꺼낸 것이 그대로 코너가 된 것. <시사터치 코미디파일>에서 이다도시 성대모사로 주목을 받았던 심현섭도 성대모사를 좀 더 활용하
|contsmark53|
자는 의견을 통해 아프리카 토속어, 성악가 등 다양한 성대모사에 도전하기도 했다.
|contsmark54|
|contsmark55|
그러나 무엇보다 초창기에 큰 인기를 끌었던 코너는 ‘앙코르 개그’였다. 박pd는 “다른 공연들은 공연이 끝나면 앙코르를 받는데 코미디 프로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프로그램이 끝난 후 재밌게 봤던 코너를 다시 보여주게 했다.
|contsmark56|
|contsmark57|
조금이라도 식상하면 바로 채널을 돌려버리는 요즘 세대의 취향을 공략하기 위해 <개그콘서트>는 매주 1/3가량을 새로운 형식의 개그로 꾸미고 각 코너들도 1∼2분을 넘지 않는 빠른 템포를 유지했다. 이 덕분에 초반부터 시청률 상위를 놓쳐 본 적이 없을 정도여서 코미디 프로그램의 부활 바람을 일으키기도 했다.
|contsmark58|
|contsmark59|
|contsmark60|
|contsmark61|
99년 7월18일 토요일 밤 9시에 파일럿 프로로 첫 방송된 <개그콘서트>는 방송 후 열렬한 반응을 얻고 9월4일부터 정규 편성됐다.
|contsmark62|
|contsmark63|
입 소문을 통해 <개그콘서트>의 인기는 날로 높아졌고 제작진들은 2000년 5월에는 고려대 노천극장에서 녹화하기도 했다. 박pd는 당시 공연을 보려온 인원들로 고대 인근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으며 교통방송조차도 “<개그콘서트> 녹화관계로 인근 교통이 혼잡하다”는 이색 멘트(?)를 했다고 전한다.
|contsmark64|
|contsmark65|
어느새 kbs의 간판 오락프로그램이 된 <개그콘서트>는 국내 코미디프로그램으로는 처음으로 2000년 국제적인 tv프로그램 페스티발인 ‘골든로즈’상 결선에 진출했으며 이외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사내 우수프로그램상 등 많은 상을 받기도 했다.
|contsmark66|
|contsmark67|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해’ 1년 후에 다른 프로그램으로 옮긴 박pd는 “그동안 몇 차례 <개그콘서트>의 위기가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랑을 받는데는 초창기의 실험정신이 계속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contsmark68|
|contsmark69|
윤지영 기자|contsmark70|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