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을 다룬 두 가지 전혀 다른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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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광우의 되감기] ‘일대종사’와 ‘엽문’

중화권 영화들 중에는 근현대기에 활약한 무술인들(곽원갑, 황비홍, 엽문, 소찬, 양로선)을 주인공으로 한 쿵후 액션영화가 많다. 이 영화들은 한편으로는 실존인물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인물전 영화들이기도 한데, 대개 중국의 근현대가 서세동점과 중일전쟁 시기와 맞물려 흔히 이들은 일본과 서양의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는 영웅으로 형상화되곤 한다.

그들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의 결투 장면에서 뛰어난 무공으로 외국의 거한들이나 프로페셔널 격투기 선수를 무찌른 후, 에필로그에서는 수많은 제자들을 길렀다는 후일담이 자막으로 처리되곤 한다. 즉, 그들이 직접 외국인과 대결해서 승리한 것은 그들이 단련한 신체와 기술의 우위를 상징하며, 그들이 제자들을 양성했고 그 제자들이 비단 중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퍼져있다는 것은 그만큼 중국의 국제적인 문화적 정체성과 자부심으로 읽히기도 한다.

특히 견자단이 주연을 맡은 <엽문1>(엽위신, 2009)와 <엽문2>(2010)는 각각 중일전쟁기에 불산을 점령한 일본에 대항하는 엽문과 홍콩에 이주한 뒤에 텃세를 부리는 홍콩의 무술인들, 그리고 중국을 멸시하는 서양의 권투선수와 대결하는 엽문을 다룬다. 엽문의 제자 중에 가장 잘알려진 이는 아마 이소룡일 것이다. 그래서 이 <엽문> 시리즈는 엽문에게 이소룡이 상징했던 중국민족주의의 가치를 덧씌운다. 이소룡은 생전에 나온 영화들에서 중국인을 괴롭히고 착취하는 외국인들을 무찌르는 장면을 연출하곤 했다. 그래서 <엽문1>은 이소룡이 사부를 죽인 일본 무술인에게 복수하는 얘기와 비슷하고, <엽문2>는 서양인을 무찌르는 <맹룡과강>과 유사하다.

▲ <엽문1>
반면 같은 인물을 다루지만 왕가위의 <일대종사>(2013)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왕가위는 김용 무협소설 <신조협려>를 각색해서 <동사서독>(1994)이라는 작품을 내놓은 적이 있다. 흔히 김용의 무협소설들은 스케일이 크고 다채로운 등장인물들이 등장하곤 한다. 그래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대하드라마로 만들기는 쉬워도 두 시간 안팎의 상영시간을 가진 영화로 압축하기에는 어렵게 마련이다. 그런데 <동사서독>은 이들 중 몇몇 인물들을 따와서 그들이 젊었을 때에 지녔던 내면의 고통과 고민을 선보인다. 이런 등장인물들의 내면의 고통을 강화하는 것은 신장-위구르 지역의 사막의 풍경이다. 즉, 왕가위는 사막이 지닌 공허감과 삭막함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드러내며 이전의 홍콩 무협영화들이 보여주지 않았던 새로운 화면을 선보임으로써 스타일 면에서나 주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도 기존의 무협영화들을 해체했다.

그러한 전력이 있어서인지(?) <일대종사> 역시 <엽문>이나 다른 근대 중국 무술인들을 다룬 영화들의 관습과 이데올로기와 결별하는 모습을 보인다. 우선, <일대종사>는 비내리는 어두운 거리에서 엽문(양조위)이 일군의 무리들과 싸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화면의 전반적인 톤은 흑백대비가 강렬하다. 이때 엽문으로 분한 양조위가 보여주는 얼굴 표정은 적을 무찌르는 비장함이 아니라, 마치 뮤지컬에서 백댄서들과 춤을 추는 무용수의 여유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보통 쿵후 액션영화의 결투 장면에서 비가 내리는 장면은 거의 없고, 사실 대부분이 액션영화에서 비가 내리는데 격투를 벌이는 설정은 드물다. 그런 점에서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이명세, 1999)의 마지막 비 속의 격투 장면이 <매트릭스3: 레볼루션> 뿐만 아니라 <일대종사>에도 미쳤음을 조심스럽게 추측해볼 수 있다.

▲ <일대종사>
비내리는 장면은 왕가위의 다른 영화들, <아비정전>, <추락천사>, <화양연화>에서도 가끔 등장한다. 이것은 우기와 건기가 나뉘는 중국의 남부지방의 기후적·지리적 특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즉, 왕가위는 이 빗속의 결투를 그린 첫 장면을 통해 기존의 무술영화와 영화관습적으로 결별하는 동시에 ‘무술인=중국의 영웅’이라는 대표성보다는 홍콩과 동남아시아의 화교권의 기억과 경험을 결합해서 홍콩의 지역적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래서 영화는 중국 남부로 원정을 온 북파 영춘권의 고수 공유천과 그 딸 궁이(장지이)와 대결하는 남부의 무술인들의 모습을 전면에 부각시킨다. 즉, 북부와 대비되는 중국 남부를 부각시킨다. 그런데 궁이와 엽문은 한 번 겨루지만 경기의 규칙에 의해 엽문이 진 것이지 사실 우열을 가리기는 어려웠다. 이는 북부와 남부의 긴장관계에서 공식적으로는 북부가 정통성을 내세우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것일 뿐이라는 인식을 반영한 설정이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주요 인물들이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전부 홍콩으로 이주해서 각자 자기 영역을 구축하고 삶을 영위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전쟁 후에 중국 각지에서 온 이주민들이 오늘날의 홍콩을 만들어왔음을 보여준다. 엽문은 제자들을 얻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이소룡인 것으로 보이는 어린 아이를 보게 된다. 그로 인해 엽문의 계보는 홍콩을 거점으로 전세계로 확산된다.

▲ 노광우 박사(고려대 정보문화연구소)·영화 칼럼니스트
그러나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친일파가 된 옛 약혼자 마삼과 결투를 벌인 궁이는 의사로 살아가지만 제자를 거두지도 못하고 쓸쓸하게 죽어간다. 즉, 엽문과 궁이의 일생을 대비시키고 전혀 공적인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지만 왕가위는 무술인을 다룬 이 영화를 통해 홍콩의 문화적·지역적 정체성과 그 역사적 기원을 관객에게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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