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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사표 내는 꿈을 꿨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료 한 명과 함께 흡사 이력서 양식 같은, 좌측 상단에 사진까지 붙인 사직서를 마련했다. 봉투에도 넣지 않아 사진이 덜렁덜렁 다 보이는 그 서류를 가지고 주인 없는 부서장 방에 둘이 들어가 연필이나 자 등을 늘어놓는 납작한 모양의 연두색 플라스틱 바구니에 넣어놓고 나왔다.

사직서를 낸 내 마음은 싱숭생숭했다. 분명 부서장 방문을 닫고 나왔는데도 그 연두색 플라스틱 바구니에 들어있는 내 사직서가 꿈 화면 우 상단에 아른거렸다. 그런데 내 동료는 기분이 좋았는지 때마침 회사 옆에 있는 놀이공원에 가자는 것이었다. 둘이 회전목마도 타고, 롤러코스터도 탔다. 타면서도 계속 사직서가 신경 쓰였다. 이제 곧 부서장이 나를 부를 것이고 불러서 사직 이유를 묻고 사직을 만류하겠지? 이런저런 답변 거리를 찾으며 모의 인터뷰를 마음속에 그리고 있자니 속이 시끄러웠다.

동료는 옆에서 연신 콧노래를 부르며 츄러스도 먹고 또 다음 놀이기구를 타려고 했다. 부서장 인터뷰도 신경 쓰이고 하니 이제 그만 하자고 했더니 “우리 사직서 벌써 수리됐어. 이제 우리는 자유야!”. 몰랐느냐는 듯 나를 쳐다보는데 나는 너무 맥이 풀려 꿈에서 깼다. ‘회사를 나간다는데 이유도 안 묻는 존재인 거냐 나는? 그리고 이제 어떡하지?’

2006년에 입사했으니까 햇수로 따지면 입사한 지 9년이 됐다. 회사를 진지하게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아주 오래전에 딱 한 번 했다. 내 이름으로 첫 연출을 할 때였는데 회사에 막 뉴스팀이 생겼고 생각지도 않았던 뉴스팀으로 발령이 났다. 어떻게 해도 이미 나 버린 발령을 돌이킬 수는 없고 뉴스는 싫으니 선택은 사직뿐이었다. 그래도 사직서를 내기 전에 다른 회사 시험을 보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고분고분 다니고 있다.

입사한 지 9년이면 내가 여태까지 속했던 집단 가운데 가족을 제외하고는 가장 오래된 조직이 회사인 셈이다. 황망한 마음으로 꿈에서 깼던 것처럼 이제는 회사에 속하지 않은 나를 상상하기 어렵다. 회사 정년을 생각하면 내가 여태까지 살아온 날만큼 회사를 더 다녀야 하는 셈이니까 어떤 면에선 섬뜩하고 끔찍하다. 내 소중한 청춘을 회사에서 주는 알량한 돈이랑 바꾸고 있다며 호기롭게 한 소리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조직을 벗어나 자아를 실현할 대단한 꿈이 있는 것도 아니고 회사에서 주는 돈도 절대 알량하지가 않아서 회사를 나간다는 것이 이제는 거의 판타지가 되어버렸다.

▲ 박유림 EBS PD
꿈 덕에 새삼 회사의 무게를 느껴보았다. 회사를 다닌다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 되어 회사고 삶이고 꿈이고 하는 경계가 완전 없었구나, 새삼 느낀다. 언제 어디든 노트북을 펴는 순간 그 장소가 나의 일터인 구루들이 21세기가 요구하는 인재라던데. 이제 와 21세기형 인재가 될 생각은 없지만 조직과 나를 좀 분리해 볼 필요가 있는 듯하다. 꿈에서 사표가 수리됐을 때 그 덜컹했던 느낌. 아직도 생생하다. 절망적이었다. 그렇게까지 절망적일 줄은 몰랐고 또 그렇게 절망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2014년은 훈련하는 한 해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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