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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의 인문학 생중계] 라퓨타, <뉴스타파>, 99%

걸리버는 세 번째 여행에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나라 라퓨타를 방문했다. 수학과 음악에 능한 라퓨타 사람들은 외모와 행동이 좀 이상했다.

“그들은 고개가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고 한쪽 눈은 안으로, 다른쪽 눈은 하늘로 돌아가 있다. 그들은 천체에 어떤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늘 걱정이다. 예컨대 태양이 가까이 다가와서 지구를 삼켜버리지 않을까, 혜성 꼬리가 지구를 스쳐서 잿더미가 되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것이다. 심오한 사색에 잠겨 있기 때문에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 일상생활에서 그들은 몹시 둔하고 어색하다. 수학과 음악의 개념을 제외한 모든 주제에서 그렇게 이해가 느리고 혼란스런 사람은 없을 것이다.”

▲ <걸리버 여행기> 3장에 나오는 라퓨타는 직경 4.5마일의 원반형으로, 자력을 이용해 하늘을 날아다닌다. 이 나라 사람들은 수학과 음악과 천체학에 빠져 있는데, 실제 생활에서 매우 우둔하다.
라퓨타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 크리메놀(치기꾼)이 따라다녔다. 바람이 가득 찬 주머니를 들고 다니며 필요할 때마다 주인의 눈을 툭 쳐서 정신이 들게 해 주는 하인이다. 걸리버는 한국에 라퓨타 사람이 한 명 살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는 “빅뱅이 불꽃놀이 같다”거나 “운석 속에 우주가 들어있다”는 뚱딴지같은 얘기를 일삼으며 정작 한국 사람들이 처한 고통에는 캄캄하기 일쑤였다. 누군가 세상 얘기를 해 주면 처음 듣는다는 듯 “아, 진짜?” “웬일이니?” “헐~” 같은 탄식을 내뱉곤 했다.

그 라퓨타 사람에겐 <뉴스타파>가 크리메놀(치기꾼)이었다. 그는 <뉴스타파>를 볼 때마다 화들짝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곤 했다. 버진 아일랜드에 세금을 빼돌린 한국 사람이 272명이라는 소식을 접했을 때도, 국정원이 탈북자를 고문해서 간첩으로 조작했다는 의혹을 들었을 때도 그랬다.

이 사람은 문제 해결도 삼단논법이라 현실과 동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는 <뉴스타파>를 본 즉시 “탈세범은 반체제 사범이므로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명쾌하게 결론지었다. “한국은 자본주의 국가다. 자본주의는 능력껏 일해서 맘껏 벌어 가라는 제도다. 단,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고 세금을 엄격히 징수한다는 게임의 룰을 확실히 지켜야 한다. 탈세는 이 기본 룰을 어긴 심각한 반칙이다. 버진 아일랜드에 세금을 빼돌린 사람들은 한국 자본주의 체제의 근간을 위협한 반체제 사범으로, 마땅히 레드카드를 받아야 한다.”

<뉴스타파>는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 탈세를 근절해야 한다고 점잖게 얘기하고 있었다. 라퓨타 사람이 볼 때 이 논조는 너무 온건했다. “저렇게 얘기해서 뭐가 바뀔 수 있겠나, 쯧쯧…. 라퓨타가 고도의 문명국으로 발전한 건 자본주의의 기본 룰을 철저히 지켰기 때문인데, 한국은 멀어도 한참 멀었구만.” 거대 방송사들은 마지못해 뒷북을 치며 몇 마디 했고, 국세청도 잠시 허둥대는 척 했다. 하지만 모두들 곧 잠잠해졌다. 반체제 사범이 한꺼번에 272명이나 나온 어마어마한 사건에 청와대도, 국회도, 심지어 국정원도 꿀 먹은 벙어리였다. 한국은 반체제 사범들이 판치는, 참 이상한 나라였다.

탈북자 간첩사건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북이 싫어서 넘어온 사람들을 국정원이 고문해서 간첩으로 조작했고, 증거를 만들기 위해 입국서류까지 위조했다는 것이다. 탈북자들은 국정원에서 조사받을 때 “옆 사람과 얘기하지 말라”는 불호령을 들었는데, 이는 북에서 겪은 일과 비슷하다고 했다. 남쪽이 북쪽보다 훨씬 우월한 줄 알았는데 막상 와 보니 별로 다를 게 없다는 얘기 아닌가. 국정원의 고문 사실이 북쪽에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탈북을 꺼리게 됐다. 북쪽 정권을 이롭게 한 셈이니, 결국 국정원도 반체제 혐의가 짙었다.

▲ 조세회피처에 재산을 은닉한 인사들의 명단을 폭로한 <뉴스타파> 보도.
라퓨타 사람은 반체제 사범들이 요직을 다 장악하고 있는 한국 체제가 와르르 무너지지 않는 게 참 신기했다. 눈이 부리부리한 <뉴스타파> 앵커는 방송 시작할 때마다 말했다. “99% 시민들의 독립언론, <뉴스타파>입니다.” 라퓨타 사람은 이 멘트마저 수학적으로 풀이했다. “아, 반체제 사범이 1%란 얘기구나. <뉴스타파>는 이 1%가 나머지 99%와 함께 오래 생존하려면 건강한 자본주의를 추구해야 하고, 그러려면 우선 반체제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고 타이르는 거구나….”

라퓨타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의 1% 반체제 사범은 굳게 단결해서 나머지 99%를 약탈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라퓨타도 1% 부자들의 나라였는데, 99% 가난뱅이들의 나라 린달리노를 수탈해서 유지하지 않았는가. 이 1%는 어떤 합리적인 말로 설득해도 스스로 욕심을 거두는 법이 없었다. “바로 당신들을 위해서 하는 말”이라며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귓속에 외쳐도 이 1%는 듣지 않았다.

라퓨타의 1%가 99%의 린달리노 사람들을 혼낼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날아다니는 라퓨타 땅을 린달리노 상공에 멈추게 하면 햇빛과 비를 차단할 수 있고, 그러면 기근과 질병 때문에 꼼짝 못 한다. 계속 까불면 한꺼번에 수천 개의 바위를 굴러 떨어뜨린다. 지붕과 머리통이 박살나는데도 저항하겠는가? 최후의 수단은 라퓨타 땅 전체로 린달리노를 쾅 받아 버리는 것이다. 린달리노는 완전히 폐허가 되지만 라퓨타는 끄덕없다.

라퓨타는 앞의 두 가지 방법을 쓴 적이 몇 번 있지만, 마지막 수단인 충돌 작전은 장관들의 반대로 한 번도 실행하지 못했다. 린달리노의 노동력이 씨가 마르면 라퓨타도 어려워진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장관들이 린달리노에 몰래 사 놓은 부동산 가격이 떨어질까봐 그랬다는 얘기가 꾸준히 돌았다. 87년 6월이었나? 라퓨타 국왕은 딱 한번 린달리노 폭도들의 요구 사항을 들어준 적이 있는데, 충돌 작전으로 멋지게 끝장내지 못한 걸 두고두고 후회했다.

1%의 부자들은 99% ‘무지랭이들’에게 굴복하는 수모를 다시는 겪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노회한 1%는 99% 시민들을 매수하고, 분열시키고, 끝없는 생존 경쟁으로 내몰아 반란을 꿈도 못 꾸게 만들었다. TV채널을 수십 개 만들어 다함께 ‘국왕 찬가’를 부르게 했고, 말을 안 들으면 등록을 취소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국왕의 뜻을 거슬려서 등록 취소를 자초하는 멍청한 사업주는 없었다. 모든 채널이 똑같은 목소리를 내자 99%의 시민들은 심하게 헷갈렸다. “어느 채널이든 똑같이 라퓨타 국왕님이 훌륭하다니, 그 말이 맞나 보네.” 1% 라퓨타 사람들은 더 자극적인 오락으로 99% 린달리노 사람들의 넋을 빼며 주머니를 쥐어짰는데, 이 또한 수입이 짭짤했다.

한국에 그나마 ‘99% 시민들의 독립언론’이 있는 건 라퓨타보다 나아 보였다. 그러나 한국의 1%는 약탈을 멈출 기미가 전혀 없었다. <뉴스타파>는 재벌 보험사가 주요 의료기관을 장악하여 진료 장소와 일정까지 결정하게 될 거라고 보도했다. 이른바 ‘의료민영화’의 실상을 알려주는 뉴스에 라퓨타 사람은 대경실색했다. 라퓨타가 바로 이 ‘의료민영화’를 시행했다가 대혼란을 자초하지 않았던가?

하늘을 떠다니는 라퓨타의 50만명은 돈이 많아서 완벽한 의료 혜택을 누렸지만 5,000만명에 달하는 린달리노 사람들은 아무리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었다. 일부 간 큰 린달리노 사람들이 은하 철도 - 이 기차도 얼마 전에 ‘민영화’했기 때문에 돈 많은 라퓨타 사람들만 탈 수 있었다 - 를 훔쳐 타고 라퓨타로 날아와 의료기구를 몰래 사용했다. 이 반역자를 색출하기 위해 나라 전체가 아수라장이 됐다. 범인은 결국 목숨을 잃었지만, 라퓨타는 ‘의료 민영화’를 철회하고 린달리노 사람에게 진료 기회를 열어 줄 수밖에 없었다.

<뉴스타파>는 한국이 라퓨타처럼 값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고 공공 의료 시스템을 유지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는데, 이 또한 한국의 1%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였다. 미국의 1%인 빌 게이츠나 조지 소로스가 99%의 조언에 공감하는데 반해, 한국의 1%는 무척 완고한 편이었다. 라퓨타 사람이 볼 때, 한국의 1%는 자신과 99%를 한참 괴롭힌 뒤에야 탐욕을 자제할 것 같았다.

<뉴스타파> 앵커는 꾸준히 얘기하고 있었다. “99% 시민들의 독립언론, <뉴스타파>입니다.”
이 소리는 최면술처럼 되풀이됐고, 라퓨타 사람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꿈에 한국 99%의 각성을 촉구하는 세계인의 집회가 나왔다. 미국, 유럽,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각국의 대표들이 서울 광장에 모였다.

“우리는 상위 1%의 탐욕에 저항하는 99%입니다. 한국의 99% 중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사람들을 우리가 깨워야 합니다. 단지 대통령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문제라는 걸 사람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멀리 하늘에서 한국 대통령이 마녀처럼 빗자루를 타고 날아왔다. 그는 서울 광장 상공에서 갑자기 20만원짜리 수표를 뿌려대기 시작했다.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기초노령 연금 약속 어겼다고 비난했더니 돈벼락으로 답하는 건가? 대통령이 뿌린 20만원을 주우려고 한국의 모든 노인들이 만세를 부르며 광장에 모여들었다. 집회 참가자들은 좁은 구석으로 쫓겨났다. 노인들의 환호는 집회 참가자들에게 불길했다. 한국 대통령이 드디어 돈으로 사람들의 넋을 빼앗아 광기를 조장하는구나, 우리들은 이제 고립돼서 더 이상 활동할 수 없겠구나….

꿈이었다. 대통령이 마녀로 변해서 빗자루를 타고 와서 하늘에서 돈을 뿌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돈에 미친 한국의 1%지만, 대통령은 돈으로 사람들의 넋을 조작할 만큼 영악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푼돈도 아까워서 벌벌 떠는 한국 1%의 쪼잔함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라퓨타 사람은 다소 안심이 됐다.

99%와 1%의 함수 관계는 여전히 알쏭달쏭했다. 99%, 조금만 더 힘을 모으면 100%를 만들 수 있을텐데, 그게 간단치 않다. 1%, 한줌도 안 되는 부자들이 나머지 99%를 약탈하고 지배하는 기술은 볼수록 대단했다. 두 집단 사이의 팽팽한 긴장은 꽤 오래 갈 것 같았다. 라퓨타 사람은 생각했다. “내가 꾸벅꾸벅 졸지만 않으면 곧 100%가 될 수 있는 걸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무튼, ‘99% 시민들의 독립언론’ <뉴스타파>는 여전히 필요해 보였다.


[참고한 영화]
<엘리지움> (닐 블롬캠프 감독, 2013)

공상과학영화 <엘리지움>은 소득 불균형과 계급 격차가 계속 심해질 때 마주치게 될 미래의 풍경을 보여준다. 2054년,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들은 지구 궤도에 호화로운 ‘엘리지움’을 건설하고 의료 혜택을 독점하며 살아간다. 압도적 다수인 평범한 사람들은 지상의 오염된 도시에서 로봇 경찰들의 감시 아래 강제노역에 시달린다. LA 슬럼에 살던 맥스는 방사선에 오염되어 닷새 뒤 죽을 운명인데, 엘리지움의 의료시설을 사용하면 나을 수 있다. 삼엄한 경계를 뚫고 엘리지움에 진입한 맥스는 결국 목숨을 잃지만, 모든 지구 주민들이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만든다. 

▲ 영화 <엘리지움>은 신자유주의가 도달하게 될 미래의 모습을 비관적으로 묘사하지만, 희망을 아주 버리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영화 <엘리지움>의 장면
조나단 스위프트(1667~1745)가 <걸리버 여행기>를 발표한 건 1726년,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은 2014년, 영화 <엘리지움>은 꼭 40년 후인 2054년이다. 시대는 다르지만 빈부격차와 사람차별은 거의 비슷하다.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라퓨타와 린달리노는 영국과 아일랜드를 상징한다. 스위프트는 식민지 아일랜드를 잔인하게 착취하는 영국에 대해 분노하며 “0.1%에 불과한 부자가 99.9%의 서민을 거지로 내몰고 있다”고 성토했다. 300년가량 지난 우리 사회는 어떤가? 외국의 직접 지배는 벗어났지만, 세계 자본의 침탈은 더 심해졌다. ‘천민자본’이란 불명예를 아직 달고 다니는 한국의 1%는 인간의 상생(相生)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2054년의 엘리지움은? 쾌적해 보이지만 위태로운 낙원이다. 지상의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에게 희망이 없으니 엘리지움도 오래 갈 수 없다.

세상이 진보한다는 주장에 선뜻 동조하기 어려운 요즘이다. 정의는 99%의 편이 아닐지도 모른다. 99%를 위한 진실은 승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신(神)이 정의를 이뤄 줄 거라는 인간의 바램은 끈질기다. 이 믿음이 상처 입을 때 사람들은 동서양 할 것 없이 신을 저주하곤 했지만, 신(神)은 말과 관념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결국 사람의 힘과 지혜로 풀어야 한다.

사람들은 결과를 미리 알기 때문에 자기 입장을 선택하고 행동하는 건 아니다. 양심에 따라 행동할 때 떳떳하게 살 수 있고 때로 희생을 무릅쓸 수도 있는 것이다. 결과를 낙관할 수 없는데도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노력을 포기할 수 없다. 이탈리아의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는 <옥중수고>에서 ‘이성의 비관, 의지의 낙관’이란 표현을 썼다.

엘리지움은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프리드리히 실러 시)에 나온다. “환희여, 아름답고 성스런 불꽃이여 / 엘리지움의 딸이여! / 너의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는 곳에 /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네!” 진보란 말을 믿지 못해도, 모든 인간이 엘리지움의 환희 속에 형제가 되는 꿈을 꿀 자유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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