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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성의 chat&책] 러시아 미술사

오래 전에 러시아를 여행했다.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2박 3일 동안 그 광대한 땅을 가로질렀다. 끝없이 이어지던 자작나무 숲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것 한 가지. 그때까지도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던 러시아 사람들의 삶이 그것인데, 살고 있는 땅의 장려함과 대비되면서 그 빈곤이 아주 뚜렷한 모습으로 되비쳤다.

유럽(러시아를 온전히 유럽이라 부를 수 있다면)국가 중에선 마지막까지 봉건제가 잔존한 국가, 과격한 사회주의 실험을 거친 끝에 다시 자본주의로 선회한 직후의 그 나라를 보면서 뭔가 항상 박자를 놓치고 있는 것 같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던 터였다. 매번 한발 씩 늦고 있다는. 그러면서 민중의 고초는 더욱 더 커진다는.

▲ 책 ‘러시아 미술사’ⓒ민음사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갔다. 19세기의 이른바 러시아 ‘이동파’ 미술 작품의 수장고 같은 곳이었다. 그 때는 이동파가 왜 이동파인지도 모를 때였다. 당대 러시아의 풍경과 삶을 묘사한 그림들은 대단히 구체적이었고 ‘쉬웠다’. 그걸 보면서 알량한 상식으로, 서유럽에선 다양한 미술적 실험이 행해졌을 그 시기에 “왜 이들은 이런 ‘뻔한’ 그림을 그렸을까, 역시 이 나라는 모든 분야에서 항상 뒤처지는 선택만 했었구나,” 라는 위험하고 가소로운 판단을 내렸다.

여행에서 돌아와서 PD협회보엔가 이런 무식과 편견을 과감하게 드러낸 여행기를 썼다. 그런데 막상 그 후에 그 생각만 하면 왠지 마음이 늘 불편했다.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단정을 했으니...그리고...

급기야 일이 터졌다. 최근 이진숙 선생의 〈러시아 미술사〉를 읽은 게 화근이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멍청한 소릴 했는지 아주 똑똑히 알게 됐다. 러시아 ‘이동파’가 이동파인 것은 미술 감상의 기회를 누리지 못하는 당시의 기층 민중을 위해 이동하면서 전시를 했기 때문이었다.

풍경이나 일상생활 등 쉬운 소재를 택한 것은 문맹률이 높았고 아직 충분히 계몽되지 못했던 동포들이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을 보여주고 싶은 ‘아름다운’ 이유에서였다. 또한 그들이 새로운 미술 형식을 실험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고 아방가르드 화가가 부재했던 것도 아니었다. 미하일 브루벨같은 걸출한 상징주의 화가도 있었고 발렌틴 세로프라는 천재 인상주의자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20세기 초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칸딘스키와 말레비치가 출현할 토양을 충분히 비축하고 있었으며 마르크 샤갈 같은 자유정신으로 충만한 예술가가 곧 탄생할 준비가 돼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동파 작품 (그것도 일부)만 봤다. 아방가르드 미술은 있는 지도 몰랐다(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때 트레티야코프의 아방가르드 전시실이 내부 수리 중이어서 관람이 불가했다).

나는 무지하고 저속했다. 이동파 그림을 보면서, 자신들의 땅과 동시대인들에 대한 충만한 애정과 슬픔으로 붓질한 풍경화를 보면서 ‘이발소 그림’ 같다고 멋대로 생각한 나 자신이 혐오스럽고 부끄럽다. 모든 디테일이 빛 속에서 뭉개지는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의 ‘세련된’ 그림과는 달리 그들의 인물화에선 사람들의 희노애락이 그대로 표정에 살아 있었다. 레핀과 수리코프의 그림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가슴이 뻐근해지는 걸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난해하고 복잡해 보이는 것일수록 모던하고 좋은 작품일 것이라는 천박한 몰상식 속에 그 자연스런 느낌을 묻어버렸다.

▲ 박종성 KBS PD
치열한 정신으로 어둠을 밝혔고 약하고 가녀린 모든 것을 사랑했으며 아름다운 대지를 긍정했던,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선배시인 네크라소프의 말을 온 몸으로 실천한 19세기 러시아 화가들에게 이 지면을 빌어 사죄한다. 또한 늦게나마 이런 깨달음을 얻게 해준 이진숙 선생에게도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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