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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후배가 온라인에 올린 글을 보았다. “엠병신을 욕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마음껏 욕해주세요. 더 먹어야 합니다.” 이 후배는 2012년 파업이 시작된 직후 입사했고, 수습이 해제되자 파업에 동참했고, 자랑스러운 MBC가 아닌 치욕의 ‘엠병신’에서 PD 생활을 시작했다. 갓난아기 PD가 첫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겪은 좌절, 아무 격려도 위로도 보낼 수 없는 선배의 무력감….

정년을 앞둔 한 선배는 “MBC에 진작 정을 떼버려서 이젠 한숨도 욕도 안 나온다”며, “요새는 누굴 만나도 아예 엠빙신 뉴스 얘기를 안 해서 오히려 맘이 편하다”고 했다. 이 선배는 좌·우, 진보·보수의 진영 논리와 관계없이 뉴스의 정도(正道)를 추구하여 두루 존경받는 기자였다. 30년 젊음을 MBC에 바친 그가 이렇게 자조할 때 얼마나 참담한 마음이었을까.

▲ 영혼 없는 사이보그가 지배하는 MBC에 새로운 미래가 있을까? ‘마봉춘’을 그리워하는 시청자들은 MBC 구성원들을 지켜보고 있다.
해고된 뒤 MBC를 안 본다. 실수로 MBC를 보게 될까 봐 아예 TV를 치워버렸다. 이 나이에 혈압 팍팍 오르면 득이 될 게 없으니까. 처음엔 암만 화나도 봐야 한다고, 그래야 책임 있는 태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묵은 트라우마가 자꾸 덧날 뿐이었다. MBC를 떠나 있는 나도 이 지경인데, MBC 안에서 매일 그 꼴을 당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이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노파심이 들기도 했다. 아니, 굴종이 습관처럼 굳어지면 MBC는 진짜 회생 불능의 3류 방송이 되는 게 아닐까…. MBC 얘기 꺼내는 것을 극력 피했다.

MBC의 사장, 본부장들은 30년 가까이 알고 지낸 사람들이다. 아니, ‘안다’는 말이 무리가 있을지 모르겠다. 누군들 제대로 알 수 있겠는가. 최소한 이름과 얼굴을 알았고, 옆에서 프로그램 만들 때는 동료 방송인으로 여겼던 사람들이다. 지금은 너무 입장 차가 커서 대화가 쉽지 않을 것이다. 파업 때 그랬던 것처럼 역지사지(易地思之)하려고 안간힘을 써 본다. 그들이 추구하는 방송은 뭘까? 많은 사람을 해고 · 징계하고, 엉뚱한 곳으로 발령을 내어 일을 빼앗고, 시용기자 · 시용PD를 채용해서 100% 자기 뜻대로 방송할 수 있게 됐다. 그 결과가 지금의 MBC 아닌가. 영향력, 신뢰도, 경쟁력이 모두 바다 밑바닥까지 침몰했고, 구성원들은 희망과 비전을 잃은 채 내부 갈등과 불신으로 골병이 들었다. 이게 그들이 원한 방송의 모습인가.

19일 안산을 찾은 이성주 노조위원장은 유족들의 싸늘한 눈총을 받아야 했다. “너희 목숨 보존하려는 거 아니냐?” 사람들은 MBC가 있는지 없는지 신경도 안 쓰고, MBC 구성원들의 아픔을 헤아려 주지도 않는다. 그나마 대놓고 MBC를 질책하는 목소리가 있어서 다행이다. “KBS가 투쟁하는데 MBC는 뭐하는 거냐?” MBC의 존재를 기억해 준다는 뜻이니 고마울 지경이다.

똑같은 말이 MBC 간부 입에서도 나왔다. “제작 거부 안 해? KBS도 한다던데 당신들은 파업 안 해? 왜 가만있어?” 부장이 히죽히죽 웃는다. 무시하고 돌아서는데 재차 비아냥거린다. “이럴 거면서 170일 동안 파업은 왜 했어? 그때 당신들 구호대로라면 지금 ‘다 물러나라’며 뛰쳐나가야 하는 것 아니야? 왜 가만히 계시나?” (한겨레21, 5월 24일자)

무릎 꿇은 포로를 점령군 졸개들이 모욕하는, 악몽 같은 풍경이다. 선배가 후배에게, 기자가 기자에게 한 말이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수준이다. 이런 마인드를 가진 자들이니 세월호 유족에게 “깡패 같은 X”이라는 둥, “그런 X들 관심 갖지 말아야 해”라는 둥, 상상하기 힘든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것이다. 영혼 없는 로봇들이 인간다운 인간을 색출해서 도륙하려고 핏발을 세우고 있는 게 지금의 MBC다.

▲ 이성주 MBC본부장이 시청자에게 사죄의 뜻을 표하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언론노조
무력감 속에 상처가 깊어만 간다. 한 기자의 고백은 MBC를 떠난 사람이나 MBC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나 똑같이 상처 입고 있음을 확인케 한다. “회사의 현 상황을 생각하면 심각한 스트레스가 쌓인다. 일절 생각하지 않고 있어서 뭐라 드릴 말이 없다.” 이 기자는 덧붙였다. “안타깝지만 MBC는 임금 받으러 오는 곳이라는 생각도 든다.” (미디어오늘, 5월 21일자)

지금의 MBC는 냉혹한 사이보그 집단이 지배하는 지옥이다. 기자, PD의 존재 이유를 박탈한 채 월급 받는 로봇으로 전락하기를 강요하는 디스토피아다. 따라서, 인간을 회복하기 위해 당장 투쟁해야 한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그러나 투쟁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MBC 구성원들의 목소리 또한 틀린 게 아니다. 한 조합원은 “두려워서 가만히 있는 건 아니다. 어느 조직이 몇 년을 계속 싸우고, 전쟁하자마자 또 전쟁할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미디어오늘, 5월 21일자) 이 말을 단순한 변명이나 자기합리화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MBC 구성원들이 지금도 투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파업과 제작거부가 유일한 투쟁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임을 포기하라는 사이보그의 압박에 맞서 자기 자신을 지키는 투쟁, 이것은 어떤 집단행동보다 더 어렵고 엄중하다. 고도의 지성과 양심과 의지를 요구하는 각자의 외로운 투쟁이기 때문이다. 이 투쟁은 길어질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MBC 구성원들의 옥석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MBC 사장이나 본부장들도 평사원 시절에는 집단 속에 파묻혀서 본성이 드러나지 않았음을 상기해야 한다. 그들이 어쩌다 사이보그가 됐는지 성찰하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엠병신’에서 첫걸음을 내디딘 막내 PD는 절망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지금은 침묵하고 있지만, 이길 수 있는 싸움을 기다리고 있고, 그 승패는 뜻을 같이하는 국민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 후배의 말에 정답이 있다. MBC가 가장 혹독한 시련을 겪는 이유가 뭐겠는가? ‘뜻을 같이 하는 국민’의 편에 서서 가장 치열하게 투쟁했기 때문이다. ‘뜻을 같이하는 국민’이 모두 수난을 겪는 이 시대, MBC가 유달리 잔인하게 짓밟히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필연 아니겠는가.

냉정해야 한다. 여기서 방점은 ‘국민’이 아니라 ‘뜻을 같이하는’에 있다. 뜻을 같이하지 않는 사람도 ‘국민’으로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언행이 사람 같지 않더라도 생물학적 인간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들이 아무리 비이성적이고, 몰상식하고, 파렴치해도 신기루처럼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았는가? “역사는 우리 편”이라는 구호는 용기를 주지만, 냉정하게 보면 주술일 뿐이다. “당신들은 파업 안 해? 왜 가만있어?”라는 비아냥이 그들의 주술인 것과 마찬가지다.

주제넘은 소리로 들릴까 봐 무척 염려되지만, 꼭 한 가지만 강조하고 싶다. 크게 보아야 한다. MBC는 세상 전부가 아니고, 세상의 중심은 더군다나 아니다. 오해 없기 바란다. MBC를 팽개치고 나오라는 얘기가 절대 아니다. MBC 안에서 일하되, ‘뜻을 같이하는’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초심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MBC에 매몰되지 말고, 더 큰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변증법’적인 감수성을 갖고 차돌처럼 버텨야 한다는 것이다. MBC가 바로 설 때 그들은 아낌없이 손뼉 치며 눈물로 지지해 줄 것이다. MBC가 방향을 잃고 쓰러질 때 그들은 쓰나미처럼 MBC를 삼켜버리고 흔적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파괴된 MBC는 다시 세워야 한다. 새로운 MBC의 모습, 그것은 MBC 구성원 한명 한명이 자신과의 투쟁을 얼마나 치열하게 수행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 작은 열매들이 모여서 커다란 나무로 자라나는 날이 곧 오리라 믿는다. 세상을 크게 보면 지금의 시련을 조금은 넉넉하게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함께 아파하는 동료들이 있지 않은가. 멀리서 선배들이 지켜보고 있고, 무엇보다 ‘마봉춘’을 기억하는 수많은 시청자가 있지 않은가.


▲ 책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웅진지식하우스
[참고한 책]
앨버트 허시만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이근영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10)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 있지?”

미국에서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때, 레이건을 비판하던 사람들은 무력감에 빠졌다. 자본의 탐욕에 날개를 달아주는 정책이 서민들에게 먹혀드는 게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반대해도 되돌릴 수 없었다. 이것은 그람시가 얘기한 ‘헤게모니 투쟁’과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경제학자 허시만은 보수주의자의 수사법에 일정한 패턴이 있음을 간파하고, 이를 세 단어로 요약했다. 첫째, Perversity. “반대해 봐라, 너만 돌아이가 된다.” 둘째, Futility. “아무리 해 봐라, 헛수고다.” 셋째, Jeopardy. “해결도 못 하는 주제에 혼란만 일으킨다.” 저항 의지를 무력화하기 위해 가혹한 탄압을 가하는 건 물론이다. 이 패턴을 학습하면 거대한 침묵의 올가미에 갇혀서 더 이상 목소리를 내기 어렵게 된다.

이에 맞서는 논리도 정형화된 수사법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다”, “투쟁해야 조금이라도 나아진다”, “역사는 우리 편이다”, 이 세 가지 진술은 보수주의자의 세 단어와 정확하게 대응한다. 양쪽 다 자기 입장에서 비타협적 주장을 반복해 온 셈이다. 허시만은 이러한 분석이 양비론이 아니라고 한다. 극단적 자세를 너머 좀 더 ‘민주주의 친화적’인 논의를 모색하자는 것이다.

이 말을 우리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국의 수구 기득권 세력은 대화하기 어려운 상대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자는 뜻으로 받아들여 본다. 상황 전체를 객관적으로 보고 행동해야 갈등 해소의 비전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MBC의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하는 데 참고가 될 수 있을까. 우석훈 교수는 “현재의 나를 만든 책 한권을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고를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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