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이사회 선거 이후 표결, 결국 정치적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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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환영 사장 해임안 가결] 뉴스 파행 장기화도 부담돼…지배구조 개선 등 과제

KBS 이사회가 5일 길환영 사장 해임제청안을 결국 통과시켰다. 안건 상정 후 두 차례 연기 끝에 이날 이사회는 길환영 사장 해임제청안에 대한 표결을 진행한 결과, 찬성 7표, 반대 4표로 가결했다.

KBS의 첫 PD 출신 사장이면서 내부 승진 사장인 길환영 사장은 취임 1년 7개월만에 해임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물러나게 됐다. 막내급 기자들이 보도 공정성 문제를 공개적으로 문제 삼고 나온지 29일, 세월호 유가족들이 항의 방문한 지 28일만의 일이다. 물론 KBS 사장 임명권자인 박근혜 대통령의 최종 사인이 남아있지만 큰 이변이 없는 한 해임제청안은 받아들여질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태는 노조 뿐만 아니라 간부부터 평직원까지 전 직군의 구성원들이 ‘사장 퇴진’을 촉구하며 나선 유례없는 일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KBS 전체 임직원의 절반이 넘는 숫자가 길환영 사장 퇴진에 연서했고, 본사 팀장 10명 중 7명이 보직을 사퇴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특히 내부 구성원의 요구로 사장이 해임된 첫 사례다. 또 2012년 언론대파업의 후유증으로 언론계 전체가 위축되어 있던 시점에 나온 승전보라는 점에서 이번 KBS 사태가 주는 의미가 크다. 그러나 길 사장 퇴진으로 KBS의 정치적 독립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KBS 구성원들이 외쳤던 ‘방송 독립’이라는 구호를 현실화하기 위한 첫 번째 난관을 겨우 넘은 것 뿐이다.  

▲ 길환영 KBS 사장이 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면담을 요구하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과 생존자 가족들을 방문해 사과를 한 뒤 현장을 빠져 나가고 있다. ⓒ오마이뉴스
■길환영 해임, 시작은 ‘세월호’= 길환영 사장이 사실상 ‘해임’에 이르게 한 촉매제는 ‘세월호 침몰 사건’이다. 세월호 사태를 전달하는 KBS 보도의 불공정성 논란과 세월호 관련 막말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상태에서 청와대의 KBS 개입설이 보도본부의 실무 책임을 맡았던 보도국장의 입에서 터져 나오면서 결국 KBS의 ‘정치 독립’문제로까지 번지게 됐다.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막말로 보직 해임된 김시곤 전 보도국장이 폭로를 주도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지만 보도책임자의 폭로가 주는 파급력은 상당했다. 

길환영 사장 퇴진 요구에 불을 지핀 것은 입사 3년차 이하 KBS 막내 기수 기자들이 지난 5월 7일 올린 세월호 보도에 대한 ‘반성문’이었지만, KBS 간부부터 전 직군의 구성원이 길 사장의 사퇴를 외치며 나오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KBS의 보도 책임자였던 김시곤 전 보도국장의 폭로란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세월호 사망자와 교통사고 사망자를 비교해 파문을 일으키며 급기야 세월호 유가족이 지난 5월 8일과 9일 KBS와 청와대를 항의방문하게 만든 김시곤 전 보도국장은 지난 5월 9일 보직사퇴를 알리는 기자회견과 이후 같은 달 16일 열린 KBS기자협회(협회장 조일수) 총회에서 ‘청와대의 KBS 개입설’을 폭로했다.

김 전 국장은 두 차례에 걸쳐 청와대와 길환영 사장이 KBS 뉴스와 인사에 직접 개입한 사례를 구체적으로 폭로했다. 김 전 국장은 “청와대 홍보수석이 직접 전화를 걸어와 해경 비판을 자제했으면 좋겠다고 했다”며 “대통령 관련 뉴스는 러닝타임 20분 내로 소화하라는 길환영 사장의 원칙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발언으로 인해 KBS의 정치 독립 문제가 일파만파로 확산됐다. KBS기자협회는 5월 19일부터 길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무기한 제작거부에 들어갔으며, KBS노동조합(위원장 백용규, 이하 KBS노조)과 언론노조 KBS본부(본부장 권오훈, 이하 KBS본부)는 지난 5월 29일부터 사상 첫 공동 파업에 돌입했다.

김 전 국장의 폭로로 궁지에 몰린 길 사장은 의혹을 전면 부인하는 등 적극적으로 해명했으며 보직 사퇴를 선언한 일부 간부에 대해서는 지방으로 인사 발령을 내는 등 무리수를 두기도 했다. 그러나 길 사장이 입장을 발표하면 할수록 내부의 반발은 더 커졌다.  

길 사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간부들의 보직 사퇴도 줄을 이었다. 지난 3일 기준 보직을 사퇴한 간부는 총 341명(국장급 2명, 부장급 59명, 팀장급 280명)으로, 본사의 경우 전체 팀장의 약 72.3%가 동참했다. 이처럼 중간 관리자급 이상의 공백이 생기며 KBS는 사실상 비상 상황에 돌입했고, 사실상 ‘길환영 체제’가 무너졌다는 말까지 나왔다.

▲ KBS노동조합(위원장 백용규)과 언론노조 KBS본부(본부장 권오훈) 조합원 1000여명이 29일 오후 3시 서울 여의도 KBS신관 계단 개념광장에 모여서 ‘공동 파업 출정식’을 갖고 있다. ⓒPD저널

■선거 후 해임, 정치적 판단?= ‘세월호’ 사태는 비단 KBS만의 위기는 아니었다. 개표방송 파행이 우려되는 속에서도 이사회가 표결을 두 차례나 연기하며 6·4 전국동시지방선거 하루 뒤인 5일 표결한 데에는 지난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지지율이 하락한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에 부담이 될 수 있을 것이란 ‘정치적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치러진 지방선거는 출범 2년차를 맞는 박근혜 정부가 처음으로 국민으로부터 평가를 받는 날이었다. 17개 시·도 광역단체장 선거 결과 새누리당이 8곳, 새정치민주연합이 9곳에서 승리했지만 선거 전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이로 인해 박근혜 정권의 재난 관리 능력과 리더십 문제가 불거지며 이른바 ‘정권 심판론’이 대두된 상황이었다.

실제로 세월호 참사 이후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하락세를 보이면서, 지난 5월 15일 여론조사 기관인 한국갤럽이 발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박 대통령의 직무 수행능력에 대해 응답자의 42%가 ‘잘못 수행하고 있다’고 답했다. 여당인 새누리당에 대한 지지율 역시 리얼미터가 집계한 5월 첫째 주 조사에서 38.1%를 기록했는데, 이 같은 지지율 하락은 약 1년 7개월 만이다.

정권과 여당에 대한 불신이 높아진 속에서 해경 관련 비판 보도를 누락시키는 등의 청와대 지시를 받아 KBS 뉴스에 사사건건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길환영 사장이 사퇴하거나 혹은 길 사장을 해임할 경우 사실상 청와대의 잘못이 사실로 드러나는 모양새가 될 수밖에 없다. 선거를 앞두고 정부와 여당, 그리고 여당의 추천을 받아 선임된 KBS이사회 여당 추천 이사들의 움직임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선거 이후 표결은 다르다. 국민의 선택이 끝난 뒤인데다가, 이사회에는 개표방송의 파행이라는 명분도 생겼다. 지난 4일 오전부터 방송을 시작한 타 방송사와 달리 오후 5시부터야 개표방송을 시작한데다 현장 생중계가 되지 못하고 개표방송에 투입될 인력이 없어 캐스터, 성우 등을 투입하는 등 KBS는 사실상 개표방송이 파행을 맞았다. 사상 최초의 개표방송 파행이라는 것은 공영방송의 총 책임자에게 충분히 물을 수 있는 책임이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뉴스는 보름 이상 단축방송 되고, 개표방송 역시 최소 인력만 투입되면서 제작거부와 파업 장기화 사태에 대한 부담이 커지자 KBS이사회는 길환영 사장 해임제청안을 가결하는 쪽을 선택했다.

▲ KBS이사회 이길영 이사장(사진 맨 왼쪽)이 길환영 사장 해임제청안을 가결한 후 이사회장을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하고 있다. ⓒ언론노조 KBS본부

■누적된 문제, ‘세월호’로 터져 나와= 이번 사태는 세월호 사건이 촉매제가 됐지만 그동안 누적되어 온 KBS의 불공정 문제가 한꺼번에 터진 것이다. 내부 첫 승진 사장이라는 길환영 사장의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로 내부 통제는 심각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후보 시절 특보를 ‘낙하산 사장’인 전임 김인규 사장과도 차이가 없었다.

KBS본부는 지난해 11월 길 사장 취임 1년을 ‘헌정 방송 1년’으로 정리한 바 있다. 길 사장 취임 이후 대선 후보 검증 프로그램이 불방되는가 하면 첫 개편에서는 현대사 왜곡 논란으로 안팎의 폐지 요구가 거셌던 <다큐극장>을 외주제작으로 편성을 강행했다.

교학사 뉴라이트 교과서를 비판한 패널이 출연한 <역사저널>이 불방 논란을 겪기도 했으며, <추적 60분>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무죄 판결의 전말’ 편 역시 “‘통합진보당 사태’가 뜨거운데 ‘국정원의 신뢰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방송’은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불방 논란을 겪은 바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제작진의 의사와 상관없이 MC가 교체된 <TV쇼 진품명품> 사태는 결국 ‘낙하산 MC’ 한 명으로 인해 해당 본부장부터 제작 PD 전원이 교체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됐다. 지난해 5월에는 박근혜 대통령 방미 수행 중 성추문 사건으로 경질당한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에 대해 보도할 때 배경화면에 태극기와 청와대 브리핑룸을 노출시키지 말하는 내용의 이른바 ‘윤창중 보도지침’ 논란이 일기도 했다.

결국 취임 이후 내내 불거진 이 같은 논란은 100%에 가까운 높은 불신임으로 드러났다. KBS본부가 지난 5월 15일부터 17일까지 길환영 사장에 대한 신임투표를 실시한 결과 97.9%이라는 압도적인 불신임률이 나온 바 있다.

▲ KBS 기자협회(협회장 조일수)가 지난 5월 19일부터 길환영 사장 퇴진을 촉구하며 무기한 제작거부에 들어감에 따라 보도국 내부가 텅 비어 있다. 사진은 지난 5월 23일 모습. ⓒKBS기자협회
■더 큰 문제는 KBS의 ‘정치 독립’= 의혹과 심증만 있던 청와대의 KBS 개입의 실체가 드러나고, 그 연결고리인 길환영 사장의 해임은 KBS 사장 임명권을 가진 대통령의 동의만을 남겨두고 있다. 간부부터 평직원까지 전 사원이 나서 사장 퇴진을 외쳤다. 그리고 길환영 사장 체제 이후 KBS가 ‘공영방송’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지 역시 이들의 몫으로 남았다.

사상 최초 선거방송 파행을 겪으면서 파업 장기화까지 우려됐지만 KBS이사회가 결단을 내리며 파업은 8일 만에 종료됐다. 양대노조 구성원들은 6일 오전 5시를 기점으로 본연의 업무로 복귀한다. 그러나 양대노조는 ‘잠정 파업’이라고 조건을 달았다. 차기 사장 선출과 KBS의 정치 독립 확보 등 지난하고 더 어려운 싸움이 남았기 때문이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지배구조 개선’이다. KBS 안팎에서는 KBS이사회에 특별다수제(재적이사 3분의 2이상 찬성)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당장 KBS이사회가 5일 임시 이사회에서 7대 4로 길환영 사장 해임제청안을 가결시켰지만 이후 차기 사장 선출 과정에서 가결에 표를 던진 7명이 어떻게 입장을 바꿀지 모르는 일이다.

현재 KBS이사회는 여야 추천 7대 4라는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있어 정부 여당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당장 길환영 사장을 사장 후보로 추천한 것도 여당 추천 이사 7명이다. 또한 지난해 12월 TV수신료를 현행 월 2500원에서 월 4000원으로 인상하는 안을 단독으로 의결한 것 역시 여당 측 이사들이다. 지배구조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되는 이유다.

KBS본부도 여러 차례 길환영 사장의 퇴진이 최종 목적이 아닌 KBS 정상화의 ‘시작’이라고 밝힌 이유이기도 하다. KBS본부는 길 사장 해임제청안이 가결된 5일 성명서를 내고 “앞으로 길 사장을 비롯한 수많은 부역 간부들이 정권에 갖다 바쳤던 공영방송 KBS를 국민의 품으로 되돌리는 지난한 싸움에 들어갈 것”이라며 “특별다수제를 비롯해 정파적 이해관계를 뛰어 넘는 독립적인 사장을 선임하기 위한 제도를 쟁취하기 위해 사내외의 모든 세력의 지혜를 모아나가고, 그 결과를 정치권에 당당히 요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KBS본부는 보도와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주요 국장들에 대한 직선제를 비롯해 제작자율성 확보를 위한 근본적인 제도 개선안을 원점에서 재검토해 새롭게 마련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길환영 사장의 해임은 청와대와 KBS 간의 오래된 유착 관계를 끊을 수 있는 기회이자 시작이다. 또한 지난 2012년 방송 독립을 위해 길고 긴 파업을 했음에도 큰 성과를 보지 못해 위축됐던 KBS를 비롯한 언론계에도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제 KBS가 정치 독립을 이루느냐 여부는 다시 KBS 구성원들의 과제로 남겨졌다. 차기 사장 체제 하에서 얼마만큼 보도 공정성과 제작 자율성을 지켜낼 수 있는지는 그동안 한 목소리를 냈던 간부들과 평직원, 양대 노조가 다시금 한 뜻으로 움직일 수 있는지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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