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눈을 통해 세상으로 나가고, 세상은 귀를 통해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
얼마 전 태교에 관한 자료를 조사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알게 된 책이 바로 <잃어버린 지혜 듣기>이다. 접하게 된 동기와 달리 책은 단순히 태교에 관한 정보서가 아니었다. 그보다 ‘듣기(Listening)’라는 영역에 대한 새로운 발견에 더 가까웠다.
저자는 ‘듣기’의 원리가 생명과 존재의 원리, 문명의 모습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방대한 자료를 통해 보여 주는데, 그 한 축은 바로 인디언을 비롯한 제3세계 원주민 사회의 ‘듣기’ 문화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책의 머리는 인디언들의 태교 문화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인디언 여성들은 임신한 사실을 알자마자 태아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한다. 조용한 숲길이나 호숫가를 홀로 거닐며 태아에게 노래를 불러주기도 하고, 새의 지저귐이나 바람 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를 흉내내기도 한다. 부락의 흥망성쇠와 같은 역사 이야기를 가락에 실어 읊어주기도 하는데, 이때 태교의 핵심이 바로 ‘듣기’이다.
태교에 있어 ‘듣기’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실제 과학적 근거들이 뒷받침 된다. 태아의 귀 기능은 임신 초기부터 다른 감각기관에 비해 빠르게 발달하는데, 귀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바로 태아의 뇌 성장을 돕는 일이다. 이때 어머니의 목소리가 주는 심리적 안정감은 정신적 자양분의 역할을 한다. 저자는 이에 대해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이의 뇌를 키운다”, “소리가 존재의 근원이다”라는 표현을 한다. 이는 꽤나 묵직하게 들린다.
인디언들의 교육은 아이가 태어나도 그대로 이어진다. 뱃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른들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 배우는 동안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공동체 문화와 내적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고 내재된 창의성을 자연스럽게 발현한다.
초기 불교와 성경, 샤머니즘 등 종교 문화 속 ‘듣기’에 대한 성찰에 이어 서구의 음악가와 소리 연구가들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도 꽤 흥미로운 ‘듣기’에 관한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잘 듣는 사람이 노래를 잘한다’, ‘노래를 잘하려면 뼈를 울려라’ 등 목소리와 듣기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주제는 평소 음치 성향을 탈출하고 싶거나 한 곡 제대로 뽑아 부르고 싶은 이들의 귀를 솔깃하게 할지도 모르겠다.
‘아이의 주의가 산만하다면 귀의 감염을 의심하라’, ‘귀가 뚫리면 혀가 부드러워진다’(외국어 배우기), ‘젊은이들은 왜 록 음악에 빠져드는 것일까’ 등의 이야기는 듣기의 치유 효과에 대한 실마리를 주기도 한다. ‘귀의 아인슈타인’이라 불리는 알프레 토마티도 이렇게 말한다. “남이 이야기할 때 딴 짓 하는 것, 읽거나 쓰는 데 서툰 것, 말하는 데 머뭇거리거나 소극적인 것, 노래 부르는 것을 싫어하는 것, 남과 대화를 잘 못하는 것, 신체적 스트레스, 심리적 질병, 감정적 동요, 노이로제, 정신병, 이 모든 것들은 서투른 듣기의 다른 모습이다.”
듣고 보니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도 귀의 오염이 심한 듯하다. 정치인들의 거짓 언어가 유행가 가사처럼 한철 장사가 되는 것을 맥없이 바라보거나 제 이익과 욕망에 빠져 아우성치는 말과 글들 사이에서 행간을 읽어내기가 숨이 차곤 하는 것도 우리 사회의 듣기 문화의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감각기관 중 귀가 발달한 사람들은 눈의 기능이 발달한 사람보다 덜 공격적이라고 한다. 자신을 낮추고 귀를 온전히 세상을 향해 열어두고 있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대체로 영적인 문화권에서 귀와 소리를 중시해 왔고, 문명이 발달한 문화권에서는 눈과 시각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왔음을 알 수 있다.
인디언의 문화와는 전혀 동떨어진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이 난독증의 사회가 조금은 이해가능한 곳으로 바뀌길 희망한다. ‘듣기’에 대한 성찰이 우리에게 그 길을 안내해줄 수 있지 않을까. 영혼과 양심, 공명의 ‘소리’들이 모여 위로와 삶의 메시지를 전해주기를.
*글쓴이 최문주는 전직 기자로, 지금은 책읽는 엄마, 때때로 잡문가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