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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의 인문학 생중계]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가면 이유를 불문하고 우선 살려야 한다. ‘선’을 행하지 않는 게 곧 ‘악’은 아니지만, 구할 수 있는 생명을 방치하는 것은 살인에 준하는 범죄가 될 수 있다.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수백 명의 아이들이 아우성칠 때 해경은 행동하지 않고 윗선의 지시를 기다렸다. 승객들을 구하려고 달려온 어민들을 오히려 막아섰다. 해경 수뇌부도 사태의 심각성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한 채 윗선의 명령을 기다렸다. 목포 해경 123정 책임자는 법정에서 “당황해서 명령을 잊었다”, “선내에 다수의 승객이 있는 줄 몰랐다”, “평소 그런 훈련은 안 해 봤다”고 둘러댔다. 모두 우왕좌왕하는 와중에 MBC는 “세월호 전원 구조”라는 오보(誤報)로 혼란을 부채질했다. 공교롭게도 대통령은 7시간 동안 자리에 없었다. “전 군과 해경의 모든 장비와 인력을 동원해서 구조작업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했지만 촌각을 다투는 현장에서는 공허한 메아리였다.

“위계 조직에서 사람들은 자기의 무능력이 입증되는 지위까지 승진하는 경향이 있다.”

이른바 ‘피터의 원리’다. 그렇다면 모든 조직의 수장은 무능한 사람들뿐일까? 그렇지는 않다. 한두 번 승진해서 새로운 지위에 올라가도 계속 유능한 수준을 유지하는 사람도 많다. 이 사람은 더 높은 자리로 승진될 가능성이 남아 있다. 그러나 최후의 승진은 어쩔 수 없이 유능한 수준에서 무능한 수준으로 바뀌게 한다. 사회적 지위 상승은 계속되고, 언젠가 무능이 드러나는 순간이 오면 상승이 멈추며, 일찍 죽는 경우를 빼면 예외가 없다는 뜻이다.

얼핏 황당하고 시니컬한 얘기로 들리지만, 이를 증명하는 사례는 무수히 존재한다. 이미 물러나신 분을 언급해서 송구스럽지만, KBS 길환영 전 사장이 떠오른다. 공영방송의 수장으로서 그를 평가하는 건 차치하더라도, 세월호 사태에 대처하는 그의 행보는 안타까울 만큼 무능했다. 분노한 유족들에게 신속히 사과하지 않았고, 김시곤 국장의 폭로와 전사원의 배척에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저 분이 평 PD나 부장, 국장까지만 했어도 저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텐데…” 혀를 끌끌 차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MBC에서 걸프전 취재로 이름을 날린 이진숙 기자는 경영진에 오른 뒤 “사람이 왜 저렇게 변했느냐?”는 질문에 늘 “나는 변한 게 없다”고 대답했다. 기자로서 유능했지만 경영진으로서 무능하다는 걸 자백한 셈이다. 징계와 업무 박탈로 구성원을 침묵시키는 데 성공했을 뿐 대화와 소통으로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는 데는 실패했다. 후배들과 싸우는 게 일이었으니,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따르면 ‘최악의 위정자’*에 해당된다. 그가 평기자로 남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 “제일 현명한 위정자는 백성의 마음에 따라 다스리고, 차선의 위정자는 이익을 미끼로 이끌며, 그 다음의 위정자는 도덕으로 백성을 설교하고, 그 다음의 위정자는 형벌로 백성을 길들이며, 최악의 위정자는 백성과 다툰다.” - 사마천 <사기>(史記) ‘화식열전’ 중

▲ 걸프전 취재로 이름을 날린 이진숙 기자(사진)는 평기자로 남았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렇다면 무능한 수장이 이끄는 조직은 어떻게 유지될까? “아직 ‘무능한 수준’에 도달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이 일을 계속하기 때문에 조직은 굴러간다.” 이 명제를 ‘피터의 제2원리’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KBS와 MBC가 이 상황에서 그럭저럭 굴러가는 건 유능한 평사원들이 많기 때문이다.

PD도 월급쟁이기 때문에 대부분 승진을 원한다. 그러나 매 단계마다 자기 무능이 입증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프로그램을 멀쩡히 하던 PD가 중간 간부가 되면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의견을 기계처럼 전하는 ‘배달부’로 돌변하고, 임원이 되면 외압이 오기 전에 알아서 기는 원격조종 로봇으로 진화하기 십상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연기력이 늘어서 제법 무게를 잡기도 한다.

최근 방송사의 승진 기준은 위계 조직에 대한 충성도일 뿐, 프로그램을 잘 하느냐는 별 고려사항이 아니다. 관행이나 사규가 중요할 뿐, 후배들의 요구나 시청자의 항의는 부차적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풍토는 조직 안에 무능과 무책임을 확산시켜 방송의 퇴행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로렌스 피터는 ‘직업적 무능’의 예를 들며 ‘피터의 원리’를 설명한다. 그가 일하던 학교의 교장은 “창문의 차양을 가지런히 할 것, 교실에서 조용히 할 것, 장미 화단에 들어가지 말 것”이 주요 관심사였을 뿐, 진정한 교육에는 무관심해 보였다.

신임 교사 클리어리는 지진아 특수학급을 맡아서 개인 능력차에 따른 맞춤형 교육을 시도했다. 아이들은 2년치 교과를 1년만에 해 냈고, 읽기와 산수에서 일반학급보다 더 좋은 성적을 올렸다. 그녀는 특수교육 과정으로 지정된 구슬꿰기와 모래놀이를 생략했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피터가 볼 때 클리어리가 해고된 것은 기존 체제를 무시하고 다음해 수업계획에 어울리지 않게 아이들의 수준을 높여놓았기 때문이었다. 피터가 ‘직업적 공식주의’라 부른 이 현상은 교육 뿐 아니라 정치, 법률, 산업 등 모든 분야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피터와 함께 이 책을 쓴 언론인 레이먼드 힐은 1,200미터 되는 교량이 끊어져 바다에 잠기는 걸 보았고, 발전소의 냉각탑 3개가 바람에 쓰러지는 걸 보았다. 가전제품 대부분이 품질보증 기간 안에 고장이 난다는 걸 발견했고, 휴스턴 실내야구장 천장으로 눈부신 햇빛이 들어와 선수가 공을 볼 수 없는 상황을 목격했다. 어느날, 연극을 보러 왔다가 우연히 만난 피터와 헐은 “무능은 왜 존재하는가?”란 화두로 새벽 3시까지 토론을 벌였다.

두 사람은 하나의 가설을 떠올렸다. “조직 구성원을 배치하는 방식에서 필연적으로 ‘무능’이란 현상이 나타나는 게 아닐까?” 그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승진하고, 승진한 뒤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함께 분석했고, 다양한 사례에 공통점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책임을 완수할 수 있는 지위에서 그렇게 할 수 없는 지위로 승진했을 때 문제점이 발생한다. 그것은 위계 조직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닥쳐올 운명이다. 그들은 각각 자신에 맞는 ‘무능한 수준’에 도달하는 경향이 있다.”

학교에서는 왜 지혜를 가르치지 않을까? 정부는 왜 질서를 유지할 수 없을까? 법원은 왜 정의를 구현하지 못 할까? 번영은 왜 행복을 낳을 수 없을까? 이 모든 물음은 ‘무능’의 분석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피터의 원리’는 20세기의 중요한 사회적, 심리적 발견의 하나가 됐다.


▲ 책 ‘피터의 원리’ⓒ21세기북스
[참고한 책]
로렌스 피터 & 레이먼드 헐 <피터의 원리> (나은영 옮김, 21세기북스, 2002)

레이먼드 헐은 “이 책을 읽으면 자신 속에 있는 무능을 극복하고, 다른 사람 속에 있는 무능을 이해함으로써 훨씬 일이 잘 풀려서 승진도 하고 돈도 더 많이 벌게 될 것”이라고 의기양양하게 책을 마무리한다. 약장수같은 얘기지만, ‘피터의 원리’를 이해하면 생활에 혁명이 일어나고 일생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PD들은 ‘피터의 원리’에서 어떤 지혜를 발견할 수 있을까? 최근 방송 상황을 보면 승진이 마냥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KBS <다큐멘터리 3일>에서 세월호 피해 가족들의 국회 농성을 다루려 했는데 담당 CP의 반대로 무산됐다는 소식이 들린다. 꽤 훌륭한 PD로 방송가에 알려져 있던 이 CP는 “너무 첨예한 논란이라 공정성이 결여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유능한 PD가 승진하여 무능한 CP로 변신한 불행한 사례로 간주한다면 지나친 속단일까?

최근 글을 쓰면서 이 시대 예능 PD들의 삶과 프로그램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PD들은 프로그램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며 창조적으로 살아간다. 이 초심을 잃는 순간 PD로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송창의, 김영희, 김태호, 서수민 등 ‘스타 PD’들은 이 기본자세에 충실했고, 승진을 위해 좌고우면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방송사 사장보다 더 널리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피터의 원리>의 한 번역본(<피터의 법칙>, 강재준 옮김, 미래사, 1994)에는 ‘창조적 무능을 위하여’란 부제가 붙어 있는데, 우리 PD들을 향해 던지는 말 같다. ‘피터의 원리’는 프로그램에 혼을 쏟아 붓고 성취와 보람을 맛보는 ‘PD의 원리’와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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