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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식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추석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 아버지에게 여쭤봤다.

“아버지, 올 추석에 어디 가고 싶으세요? 영동에 있는 할아버지 산소든, 동해에 있는 고모 산소든, 아버지가 가시고 싶은 곳으로 어디든 모실게.”

잠깐 생각해보더니 하시는 말씀.

“난 괌이나 사이판 같은 데로 가고 싶은데.”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보라카이로 갔다. 아내는 딸들과 친정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나는 아버지랑 단둘이 해외여행. 고속도로 교통 체증에 시달릴 이유도, 아내가 시댁에 가서 봉사할 필요도, 내가 처가에 가서 눈치 볼 이유도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명절 해법 아닌가!

“아버지가 건강하시니까 이렇게 같이 여행도 다니고 정말 좋네요.”
“그렇지, 참 고마운 일이지. 넌 살면서 제일 감사한 일이 뭐냐?”
“그야 MBC에 PD로 입사한 거죠. 덕분에 천직을 찾았으니까요.”

공대를 나와, 영업사원에, 통역사에,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하다, 1996년 MBC 공채를 통해 PD가 되었다. 합격 소식을 전해들은 아버지의 첫마디.

“MBC는 ‘빽’이 없어도 들어가는 회사인가 보구나.”

1960년대 중앙대 신문방송학과를 나온 아버지는 정작 언론사에 취업하지 못하고 평생을 시골학교 영어교사로 사셨다. 그 시절, ‘빽’이 없어 기자가 되지 못했다고 생각하시는 아버지, 당신 아들이 MBC에 PD로 입사한 걸 무척 신기해하셨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때 네가 MBC 들어간 건 진짜 천운이었어.”
“그럼요, 살면서 가장 감사한 일이라니까요.”
“야, 이놈아. 그걸 아는 놈이 노조에 들어가서 그렇게 회사랑 싸웠냐?”

재작년에 나는 MBC 노조에서 편제부문 부위원장으로 일했는데, 모시고 살던 아버지에게는 그 사실을 숨겼다. 그런데 어느 날 검찰에서 날아온 구속영장 실질심사 출석 고지서 때문에 들통 나 버렸다. 그때 놀란 아버지 가슴을 달래려면 보라카이가 아니라 세계 일주를 모셔도 부족한 판이다. 아버지는 지금도 착한 딴따라 아들을 빨갱이로 만든 원흉이 노조라 생각하신다.

“아버지, 제가 ‘빽’도 없이 MBC 입사한 비결이 뭘까요? 그건 MBC가 노조가 강한 덕분이죠. 재벌 소유거나 높은 사람 눈치 보는 회사라면, 돈 있고 ‘빽’ 있는 사람 들어오기가 쉽겠죠? MBC는요, 노조가 강해서 입사하는데 부정이 없어요. 노조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데 어디 감히. 전 노조 덕분에 방송사 들어온 거구요. 그 고마움을 갚으려고 노조에서 일한 거예요. 그러니 제발 노조 욕 좀 하지 마세요. 아버지 아들이 아직 회사에 붙어있는 이유가 뭐겠어요? 그게 다 노조 덕분이라니까요.”

나이 서른에 예능PD로 뽑힌 것도 고맙지만, 나이 마흔에 드라마국에서 받아준 것도 정말 감사한 일이다. 2007년 드라마 PD 사내 공모에 지원했는데, 당시 어느 부장님이 면접에서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우리가 김민식 씨를 왜 뽑는 줄 알아? 10년 후, 우리가 늙고 힘없는 골방 늙은이가 되었을 때, 당신이 히트시킨 드라마로 광고 팔아서 월급 받는 게 꿈이기 때문이야. 당신은 우리의 노후 대책인거지.”

▲ 김민식 MBC PD
아직 선배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건 정말 죄송할 뿐이다. 하지만 요즘 회사에 도는 소문을 들어보니 흉흉하기 그지없다. 올해부터 뽑는 신입 사원은 연봉제라느니, 기수별 정규 공채는 없다느니. 사람 뽑아 키우는 게 가장 큰일인데, 노조가 맥을 못 추는 탓인지, 요즘 회사는 정말 막 가는 것 같다. 노조가 밉고 좋고를 떠나서, 제작자의 열정과 헌신으로 먹고 사는 회사다. 똘똘한 아이들 뽑아 씩씩하게 키울 생각은 못하고, 너무 기부터 꺾는 것 아닌가? 정말 불안하다. 10년 후, 나의 노후는 어찌할꼬?

*글쓴이 김민식은 MBC 드라마 PD. 블로그 ‘공짜로 즐기는 세상’을 운영하며 글 팔아 책 사는 생계형 독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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