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역사전문 PD가 본 다큐 ‘백년전쟁’ 판결의 문제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KBS 장영주 PD “법원 자의적으로 역사 해석·이승만 친일 학계서도 상식”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8월 28일 RTV가 방영한 이승만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등을 비판적으로 다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이 공정성, 객관성 위반 등을 이유로 심의규정을 위반했다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관계자 징계 및 경고 처분이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대해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소장 서보학)는 지난 7일 오후 참여연대 1층 카페에서 <백년전쟁> 패소 판결에 대한 문제를 짚어보는 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KBS에서 역사프로그램을 오랫동안 연출한 장영주 KBS PD가 패널로 참석해 판결문에 나타난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장 PD는 “전체적으로 법원이 판단의 근거로 제시한 내용들은 사실에 입각하지 않은 경우가 많으며 명백한 증거조차 부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PD저널>은 장영주 PD로부터 이날 좌담회에서 발표한 토론문을 원고로 받아 게재한다. <편집자>

▲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작한 역사다큐 <백년전쟁> ⓒ백년전쟁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판결문에서 판사는 자의로 역사해석을 하고 있다. 법원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방송은 진실을 왜곡하지 아니하여야 한다’라는 방송심의규정 9조 1항 등을 위반했다고 판단한 것이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프로그램에서 제시된 증거들이 편향적이고 왜곡되어 있다는 법원의 판단은 역사적 사실과 오히려 배치된다. 이는 판결에 참가한 판사들이 전문역사지식의 부족으로 일반적 상식에 따라 예단하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잘못된 판결의 뿌리는 이승만에 대한 상식의 충돌

3.1운동 이전까지 이승만은 배일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친일발언이 잦은 친일지식인이었다는 사실은 학계에서는 거의 상식처럼 통한다. 일반인들은 이 학계의 상식을 잘 모르고 있기도 하고 너무 충격적이어서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있다.

예를 들면 이승만의 대표적 저작인 ‘독립정신’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강조한 ‘독립’을 일제에 대한 것으로 착각한다. 1904년 집필되고 1910년 출판된 이 책은 일본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와 다른 열강의 간섭에서 우리가 독립해야 한다는 친일 주장이 곳곳에 담긴 서적일 뿐이다.

“우리나라 신민들이 일본에 대하야 깁히 감사히 녁일 바-로라”
“아라사를 이기고 군함을 파하였으니 이러한 경사가 다시없다 하는지라 눈 있고 귀 있는 자야 어찌 참아 이것을 듣고 보며 감동하는 눈물이 나지 아니하리오.”(독립정신)

▲ 이승만의 대표적 저작인 ‘독립정신’의 ‘독립’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제에 대한 독립으로 착각한다. 1904년 집필되고 1910년 출판된 이 책은 일본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와 다른 열강의 간섭에서 우리가 독립해야 한다는 친일 주장이 곳곳에 담긴 서적일 뿐이다.ⓒ장영주 PD
판결문은 1905년 “이승만 대통령이 고종의 밀사자격으로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도와 줄 것을 요청했다”고 적시하고 있다. 착각일 뿐이다. 실제 이승만 일행은 황제가 아닌 일진회의 대표로 왔다고 기자들에게 분명히 밝히고 있다(Il Chin Hoi, which, translated, means 'The Dally Progress). 당시 일진회는 함께 독립협회 활동을 했던 윤시병이 회장이었고 송병준, 이용구 등이 핵심 인사였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은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1905.8.3.)에서는 ‘만약의 경우 러시아와 일본 어디의 통치를 원하는가’ 라는 질문에 ‘러시아에 대항해 아시아 황인종은 하나로 싸우겠다’고 대답하고 있다. 을사늑약을 앞둔 시점에 이승만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 대신 오히려 일본과 연합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If it came to resisting Russian sovereignty the so-called yellow peoples of Asia would stand together as a unit.”- 뉴욕타임즈

이처럼 청년 이승만의 친일 성향은 매우 강했다. 이 성향은 3.1운동 이후에야 약화된다. 이런 맥락에서 한일강제병합후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1912.12.18.)에서 ‘합방 이후 경성이 현대적으로 변했다’고 강제병합을 긍정적으로 말하게 되며, 임시정부 대통령직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대일전은 불가능하며 조선총독이 한국인의 성원을 얻고 있다(1922.하와이)’고 발언하게 된다.

▲ 1912년 11월 18일자 <워싱턴포스트>에 실려 지금도 검색 가능한 이승만의 ‘경술국치 이후 경성이 발달했다’는 인터뷰. ⓒ장영주 PD
국내 최고 ‘이승만 전문가’를 객관적이지 않다고 비난하는 판결

이승만 연구에 대한 국내 최고의 전문가는 서중석 교수와 정병준 교수이다. 논문을 분석해보면 이승만에 대한 논문은 서중석 교수가 15건으로 1위, 정병준 교수가 11건으로 2위를 달리고 있다. 정병준은 ‘이승만 연구’라는 800여쪽에 달하는 학술서적을 저술했다. 이 두 사람이 <백년전쟁>의 메인 연사인데 법원은 이들을 법원객관적이지 않은 일부 학자라고 단정하고 있다. 심지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결정문에서 “이승만에 대해 부정적인 학자들의 인터뷰만을 방송해 사실을 왜곡했다”라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3.1운동 이전에 이승만이 배일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뉴라이트 학자들조차 부정하지 못하는 학계의 공통적 견해이다.

인터넷 기사가 판결의 기준이 되다

판결문에서 <백년전쟁>의 문제를 표로 지적한 다섯 가지는 어디선가 본 구절이다. 바로 인터넷신문 <뉴데일리>에 실린 김효선 건국이념보급회 사무총장의 기사(2013년 3월 16일자)에서 토씨한자 바꾸지 않고 가져온 것이다. 기사의 번역오류도 판결문에 반복되고 있다. 기사를 작성한 김효선 등은 <풀어쓴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출판하면서 원본 독립정신에 있었던 이승만의 친일적 발언을 삭제하고 출판한 전력이 있기도 하다. [뉴데일리 관련기사 ☞]

그 기사는  <워싱턴포스트>에 실려 지금도 검색 가능한 이승만의 ‘경술국치 이후 경성이 발달했다’는 인터뷰(1912년 12월 18일자)를 찾지 못하고는 그런 기사는 없었다고 부정하고 있으며, 이승만이 하와이 법정에서 진술한 내용이 당시 신문(신한민보)에도 실려 있지만 없다고 부정하고 있다. 문제는 판결문에도 그 기사의 실수가 그대로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법원은 한국에서 가장 정통한 이승만 연구 역사학자들의 의견은 배척하고 오류가 있는 인터넷 기사는 사실에 부합한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판결문이 적시한 다섯 문제점의 문제점

판결문을 보면 <백년전쟁> 1편 프로그램에서 법원이 지적한 문제는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다. 법원은 다섯 쟁점에 대한 방송요지와 다른 해석의 가능성 및 방송의 문제점을 표로 제시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많은 오류가 나타난다. 곳곳에서 잘못된 사실과 번역을 바탕으로 올바른 내용을 왜곡이라 단정하고 있다.

1. “이승만 대통령이 고종의 밀사자격으로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도와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 미국에 가게 된 내용 및 이승만 대통령의 박사학위 논문이 여러 책에서 인용될 정도로 우수한 점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판결문 표1)

판결문은 잘못된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고종의 밀사자격이 아님은 이미 잘 알려진 바다. 뉴욕타임즈, 워싱턴타임즈, 뉴욕트리뷴 등의 인터뷰 기사에서 ‘we are not representatives of the Emperor’(우리는 황제의 대표가 아니다 – 1905년 8월 4일자 뉴욕트리뷴)라고 인터뷰하고 있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이 일진회의 대표라고 인터뷰했다. 법원은 이런 당사자의 실제 인터뷰 내용마저 배척하고 잘못된 상식에 근거한 주장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의 논문은 박사학위 논문임에도 114페이지에 불과한 간략한 것이며 중립성에 대한 사안들을 연대기 식으로 모은 것이라 우수한 논문이라 단정하기가 오히려 힘든 상황이다.

2. “우리 하와이 한인학교는 일본인에 대한 증오를 일체 가르치지 않는다...”(판결문 표 2)

 “We do not teach in our school anything anti-Japanese... I do not wish to create any anti-Japanese sentiment among our people.” - 호놀롤루 스타 불리턴 1916.10.16

<백년전쟁>에서는 “우리 학교에서는 일본을 비판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반일감정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원문의 “anti-Japanese sentiment”는 번역하면 ‘반일감정’이다. 그러나 판결문은 ‘일본인에 대한 증오’로 축소하는 잘못된 번역을 제시하고 있다. 뉴데일리의 번역과 동일하다. 왜곡은 프로그램이 아닌 판결문이 하고 있다.

3. “이승만이 ‘위험한 배일행동으로 일본군함 이즈모호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면 파괴하려고 한다며 음모’라고 법정 증언했다는 주장을 인정할 객관적인 자료가 없다.” (판결문 표 3)

출운호 사건은 굉장히 유명한 일이라 곳곳에 이승만의 법정 발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신한민보(1918.6.27)는 이 사건에 대해 자세히 보도했는데 이 사건의 배후인물로 이승만을 지목했다. 이승만이 한때 동지였던 박용만이 일본 군함 출운호의 폭파하려 한다는 혐의를 주장하며 증인으로 나섰다. 박용만의 기고와 ‘재미한인50년사’에도 나타나고 국가보훈처 박용만의 대통령포장 공적조서에도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객관적 자료가 없다는 법원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공적인 국가 기록조차 법원이 부정하는 주장이다.

▲ 사진은 출운호 사건을 보도한 1918년 6월 27일자 신한민보.
4. 이승만과 여대생 김노디의 ‘맨(Mann) 법’(기혼자가 아내가 아닌 여성과 함께 주 경계를 넘으면 처벌하는 당시 미국 법률)위반 문제에서 수사관들이 이승만을 기소했다는 주장은 “무혐의 처분을 받았기 때문에 근거가 없다.”(판결문 표 4)

시카고 이민국 책임자가 다섯 곳의 다른 주 이민국에 이 사안을 통보했으며 대부분의 서적에서는 이승만이 수사관에 의해 “기소됐다”(Charged)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 대통령의 신분으로 매춘혐의 수사를 받은 것 자체가 더 큰 문제이다.

5. “그는 이러한 목적을 추구함에 있어서, 자신의 성취를 위해 활용할 마음이 있는 세력들이 누군지에 관하여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판결문 표 5)

▷ “In pursuing this end he has shown few scruples about the elements which he has been willing to utilize for his personal advancement” (CIA문서 1948.10.28.)

이 CIA 문서에서 ‘scruple’의 뜻은 ‘ethical consideration or principle that inhibits action’(양심의 가책)이다. 이를 판결문에서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것은 의역이라기보다는 고의적인 축소 왜곡에 가깝다. “이 목적을 추구하면서 그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라고 해석한 백년전쟁의 번역이 더 정확하다.

판결의 문제, 이승만의 문제

전체적으로 법원이 판단의 근거로 제시한 내용은 사실에 입각하지 않은 경우가 많으며 명백한 증거조차 부정하고 있다. 증거주의 재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반면 백년전쟁의 입증자료에서는 거의 오류를 찾기가 어렵다. 유일한 프로그램의 오류는 유영익 교수의 저서의 오류를 답습해 다른 사람의 사진을 노디김이라 착각해 표기한 것 정도일 뿐이다.

이승만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런 소모적 논란은 무장독립운동을 경멸하다 코델헐 미국무장관이 “자신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민족을 지원하지 않겠다”는 발언에 놀라 1940년대에야 자주적 독립운동을 수용한 이승만의 모순적 삶이 가져다준 필연일지도 모르겠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