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져보기] ‘미생’ 창조적인 각색의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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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색이나 리메이크로 새롭게 탄생한 작품에 별개의 독창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대상이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라면 덜컥 걱정부터 앞서기도 한다. 그 별개의 독창성이 딱히 독창적이지 못한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이다. 가령 작위적인 갈등을 대폭 첨가한다든지, 기능적인 캐릭터를 보강한다든지, 연애를 비롯한 자극적인 사건들을 부각한다든지 하는 것들.

사실 매회 60여 분, 최소 16부작이라는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의 양적 여건하에서 이 같은 고려가 불가결한 사례도 적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각색을 선택했다면 원작으로부터 받은 메시지 또는 각색자만의 해석이 존재할 텐데, 지나친 변형은 종종 그 메시지와 해석마저 흐릿하게 만드는 한편 원작을 고려하지 않은 별개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마저 해치고 마니 말이다.

tvN의 새 드라마 <미생>도 언뜻 이러한 종전 한국 각색 드라마의 관습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윤태호 작가의 동명 원작 웹툰은 대체로 담담한 어투의 만화다. 바둑 기사의 진로에서 좌절한 후 일반기업에 입사한 인턴 장그래의 시선으로 하루하루의 일상을 그려낸 이 작품에는 과하게 극적인 갈등도 없고 그다지 모난 인물도 없다.

▲ tvN <미생> 1화 장면. ⓒCJ E&M
말하자면 방영된 드라마에서처럼 주인공을 공공연히 무시하고 괴롭히려는 동료 사원도 없고, 그의 계략에 의해 밤이 늦도록 오징어 젓갈 공장에 남아 오징어 젓갈에서 꼴뚜기를 골라내야만 하는 주인공의 고초도 없으며, 여주인공 또한 그런 주인공과 엘리베이터에 탈 때마다 만나는 식으로 자주 얽히지도 않는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드라마 <미생>의 진짜 성취 또한 이처럼 새롭게 가미된 부분에서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예컨대 출근 첫날의 지옥을 묘사한 드라마의 1회를 보자. 전화를 받으면 어떻게 응대해야 하는지, 심지어 해외에서 온 전화라면 어째야 하는지, 복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종이가 떨어졌을 때는 또 어째야 하는지, 누구에게 물어봤자 그 정도도 알아서 못하느냐며 핀잔만 되돌아와 막막한 장그래(임시완)의 모습은, 직장 생활을 해본 이라면 한번쯤 겪었을 전쟁 같은 기억을 소환하며 곧바로 구체적인 현실감을 획득한다.

원작만화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이 에피소드들, 그러니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사건이나 장치가 아니라 공감할 수 있는 일상의 리얼리티에 천착한데서 비롯된 극적 긴장은 드라마에 새롭게 첨가된 설정에도 생동감을 부여한다. 장그래의 어쩔 수 없는 어리바리함이 자연스럽게 그의 조력자는 물론 적대자를 낳고, 능력이 출중한 여주인공 안영이(강소라)와의 잦은 접촉도 설득력 있게 보강할 수 있게 된 셈이니 말이다.

아울러 원작에서 가져온 ‘난 열심히 하지 않아서 세상으로 나온 거다’라든가 ‘여기선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다’와 같은 메시지들 또한 드라마를 통해 급격해진 감정과 사건의 파고에 의해 더욱 절절하게 부각된다.

독창적인 톤과 매너는 유지하되, 원작의 메시지를 지표로 삼아 근본 취지를 잊지 않고자 하는 드라마 <미생>의 시도는 각색의 모범사례로서 첫 단추를 꿰었다. 또한 이러한 시도가 때로 만화 <미생>의 컷과 컷 사이 여백에 대한 드라마 버전의 해석이라 해도 좋을 만큼 원작의 세계를 확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모든 성취는 원작과 드라마가 공유하고 있는 확고한 기조, 바로 리얼리티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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