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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 옹졸하게 욕을 하고’

김수영 시인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내용이다. ‘십상시의 난’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해명에, 성희롱과 욕설에 대한 서울시향 박현정 대표의 핑계에, 사무장을 내리게 한 대한항공 조현아 부사장의 변명에 분개할 때 문득 저 시가 떠올랐다.

왜 그녀는 마카다미아에만 분개하는가 / 승무원의 몸을 옥죄는 유니폼에 분개하지 않고 / 카다미아를 ‘명의회손’ 하는가//
왜 그녀는 여직원 곧은 다리에만 분개하는가 / 음악가를 음악으로 평가하지 않는 풍토에 분개하지 않고 / 가련한 직원들에게만 액셀을 밟는가 //
왜 그녀는 찌라시에만 분개하는가 / 십상시들의 권력놀음에 분개하지 않고 / 자신에 대한 비판이 불경하다고만 하는가//

▲ 사진은 8일 서울 중구 서소문동 대한항공 빌딩 로비 모습. ⓒ뉴스1
국민들이 분개하자 그들은 나름대로 변명했다. 그러나 그 변명이 국민들을 더 화나게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찌라시가 문제다”라고 말했다. 그 찌라시를 만든 곳이 청와대라는 것, 그 찌라시의 내용이 대부분 맞아들어간다는 것은 개의치 않았다. 국민은 달을 보고 있는데 손가락만 탓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박현정 대표는 정명훈만 탓했고, 조현아 부사장은 규정대로 땅콩을 주지 않았다며 변명했다. 자신의 문제는 인정하지 않고 구실을 찾기 바빴다.

이 사건 전에 국민을 분노하게 했던 사건이 있었다. 압구정동 신현대아파트 경비원의 분신이었다. 이 경비원은 입주민들의 비인격적인 대우를 고발하며 분신했다. 그런데 아파트 주민들은 경비원에게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경비원이 속한 경비 회사와의 용역 재계약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106명의 노동자를 집단 해고해 버리는 방식으로 이 사건을 해결했다.

우리는 왜 이런 일에 분개하는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우리의 인본주의 의식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처럼 특권의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미천하게 보는 것은 우리가 이룬 사회적 진화를 부정하는 것이다. 조선이 멸망한 후 식민지와 남북 전쟁 그리고 독재를 거치면서 우리가 어렵게 이룬 공화국의 가치에 위배된다. 그래서 이들의 ‘개인 일탈’이 ‘공분’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저개발 국가에서 오래 근무하거나 살았던 적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한다. 그들 국가에는 사람 밑에 사람이 있다는, 즉 ‘불가촉천민’이 존재한다는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가지지 못하고 배우지 못하고 학대받는 사람들의 불행에 대해서 침묵한다. 그들은 동등한 권리를 누릴 자격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이런 의식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일련의 일들로 인해 그렇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대한민국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자기들이 누려야 할 아주 사소한 권리까지 충실하게 요구한다. 대통령은 자신에게 불리한 보고서는 언론에 보도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오케스트라단 단장은 목표 달성을 위해 자신의 직원들을 학대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항공사 오너의 자녀는 땅콩을 편하게 먹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신현대아파트 주민들은 경비원 따위의 일에 의해 사람들에게 공격받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

▲ 고재열 시사IN 문화팀장.
자신의 사소한 권리에는 목소리를 높이면서 그들은 인간 존엄의 근본 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내 앞의 작은 권리를 위해 상대방의 존엄을 짓밟으면서도 태연하다. 이들의 이런 모습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의 위기다. 그들이 조그만 일에 분개하는 것에 우리가 크게 분개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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