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비정규직 장그래가 완생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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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 칼폴라니 연구소 창립 준비위원

오랜만에 ‘본방사수’하는 드라마가 생겼다. 금요일과 주말의 술 약속 때문에 본 방송을 보지 못하는 경우엔, 취기로 무거워진 눈꺼풀을 억지로 끌어 올려 새벽 세시 반의 첫 재방송을 볼 정도다. tvN의 <미생>이다.

그 흔한 신데렐라 스토리나 출생의 비밀, 또는 경영권을 둘러싼 암투 등 기업드라마의 필수 구성 요소가 하나도 없으면서 어떻게 케이블방송의 드라마가 6%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을까. 아마도 직장인들의 절대적 공감이 그 이유일 테다. 하지만 그것도 나한테는 해당 사항이 없다. 공부를 빌미로 청년기엔 백수였고 그 이후의 직장에선, 대통령 빼곤 별로 무서워 할만한 상사가 없거나 내 스스로 장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남자니까 안영이의 수모 역시 뼛속까지 공감한다고 말할 수 없다.

나아가서 내 어설픈 경제 지식이 드라마의 현실성과 부딪히기도 한다. 2012년은 종합상사의 전성기가 한참 지난 시점이다. 종합상사는 대기업들도 아직 전문적인 해외 인맥이나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지 못할 때 ‘라면부터 미사일까지’ 수출을 대행하던 조직이다.

하지만 현대자동차나 삼성반도체처럼 재벌들의 전문화가 어느 정도 이뤄진 뒤에는 현지 생산과 기업 자체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압도적 물량이 소화됐다. 이윽고 종합상사의 시대는 막을 내렸고, 정부는 2009년에 종합상사 지정제를 폐지했다. 말하자면 아무리 대기업이라고 해도 현재의 종합상사에, 각국 언어를 네이티브 스피커(원어민) 수준으로 하는 탁월한 신입사원이 모여들 것 같지는 않다.

▲ tvN <미생>.ⓒtvN
하지만 ‘13국(13화)’부터 나도 미생에 푹 빠지기 시작했는데 장그래가 비정규 계약직이라는 사실을 꾹꾹 눌러 보여주기 때문이다. 프로 입단을 앞두고 집안 사정으로 입단을 포기한 장그래는 바둑 특유의 거시적 관점과 흐름에 대한 느낌, 복기의 성실함과 불리할 때의 인내심을 바탕으로 뛰어난 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그는 검정고시 출신의 비정규직일 뿐이다. 실제로 장그래는 미생 정도가 아니라 ‘사석(死石, 죽은 돌)’이다. 일반 청년들은 미생은커녕, 사석이 될 자격조차 얻기 힘든 게 한국의 현실이다. 해서 수많은 청년들이 ‘비경활’ (비경제활동인구, 취업준비자는 경제활동인구에 들어가지도 못하니까 실업자 계산에도 빠진다)로 분류되고 있다.

참을성 없는 시청자들이 윤태호 작가의 원작에 기대서 흘린 스포일러에 따르면 지금 충분히 알면서도 위험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오차장은 결국 장그래를 데리고 독립한다. 하지만 중소기업의 ‘미생’은 더더욱 위험하다. 청년들에게 중소기업이야말로 취업과 비경활을 반복하는 ‘빈곤의 늪’으로 향하는 관문이 아닌가.(드라마에서 장그래의 첫 직장도 중소기업이었지만 곧 그만 두었다.)

이런 엄청난 문제에 대해선 드라마 속에서라도 어떤 해법을 제시하긴 어려울 것이다. 대한민국의 현실이 애초부터 미생이다. 이제 정부가 뭔가 제시해야 할 때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청문회 즈음에 대한민국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선 성장도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뚜껑을 연 ‘초이노믹스’는 구조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정규직 시장의 유연성을 높이겠다고 주장한다. 장백기, 안영이, 한석률 나아가서 각양각색의 대리들을 마음 놓고 해고하게 만들면 장그래의 문제가 해결될까. 경제이론과 역사는 정반대로 나라의 총수요가 줄어들어 경제가 더욱 수렁 속으로 빠져들 것이라고 말한다.

바둑에서처럼 두 집 짓고 완생하는 일이란 우리 인생에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바둑과 달리 제로섬 게임이 아닌 현실에서는 우리 모두 공생할 수 있지 않을까. 스웨덴이 복지국가의 틀을 갖춘 시점이 1960년대라는 걸 생각해 보면 우리의 물질적 생산 능력은 공생의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별 차이가 없어 서로를 존중하며 공존할 수 있는 경제야말로 더 강한 경제가 아닐까. 하지만 ‘줄푸세’라는 한국 현실에서 오차장과 장그래, 그리고 김대리의 중소기업이 활짝 피어나는 그림을 그린다면 그 또한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드라마가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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