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재윤 PD의 포스트라디오 ④] 디지털라디오(上)

To do or not to do? That is the question.

2004년, 한국 라디오업계의 고민은 이랬습니다. “디지털라디오를 시작할 것인가? 여전히 광고 수입 쏠쏠한 FM으로 버틸 것인가?”

2014년, 이 질문은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디지털라디오, 이제라도 해야 하나? 아예 건너뛰고 스트리밍에 ‘몰빵’해야 하나?”

이런 가운데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치 않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라디오가 빠져있는 양자택일 혹은 범위한정의 함정, 의사결정 오류입니다.

코닥과 후지, 아시다시피 카메라 대중화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세계 필름시장을 양분하고 있었던 동서양의 강자 기업들입니다. 디지털 기술이 여러 산업분야에서 응용되기 시작할 때, 이 둘은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사진도 화학물질이 아닌 디지털 화소에 기록할 수 있다. 디지털 기록장치가 필름을 대체할 수도 있다. 단지 시간의 문제일 뿐”

▲ 코닥필름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을 두고 두 회사의 대응은 달랐습니다. 한 회사는 “디지털사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야 할까? 아니면 기존 필름시장을 지켜야 할까?”라는 고민에 빠졌고, 또 다른 회사는 “필름사진이 사양화되는 상황에서 우린 무엇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 물었습니다. 전자는 새로운 기술이 기존 필름 시장을 갉아먹을까 전전긍긍하던 끝에 시장 진입 시기를 놓쳐 결국 파산했고, 후자는 필름사업에서 갈고 닦은 콜라겐 기술을 응용, 관련 화장품 사업으로 새로운 캐시카우를 만들었습니다.

많이 들어본 일화시지요? 전자는 코닥, 후자는 후지입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디지털카메라 산업 초기 관련 특허를 가장 많이 보유한 회사가 코닥이었다는 점입니다. ‘할까 말까’, 소위 ‘햄릿’식 고민이 코닥의 선택지를 확 줄여버린 반면, 후지의 질문은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대안을 찾을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문제를 대하는 코닥의 이런 자세가 바로 앞서 말씀드렸던 ‘의사결정에 관한 범위한정 오류’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라디오업계는 강산도 변한다는(요즘은 서너 번도 변한다는) 10년이 넘도록 코닥과 같은 생각의 덫에 걸려있습니다. 디지털라디오를 할까 말까, 디지털라디오가 답일까 스트리밍이 답일까? 대상만 변했을 뿐 양자택일의 질문법은 여전합니다. 방송사뿐 아닙니다. 허가사업인 방송 산업의 또 다른 축이라 할 수 있는 정부 또한 객관식 답안을 넘어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할꺼야? 말꺼야? 10년이 넘도록 다그치시다가 요즘은 잘 묻지도 않으십니다.

들어는 봤지만 들어본 적 없는 ‘디지털라디오’, 대체 무엇인가?

우리 방송업계에서 말하는 ‘디지털라디오’는, 좀 더 정확히 말해서 DAB/DAB+, DRM/DRM+, HD Radio 등 ‘오디오의 디지털 전송 기술표준’을 뜻합니다. 오디오를 디지털 신호로 압축하여 전달하기 때문에 같은 주파수 범위 내에 FM보다 몇 배 많은 채널을 넣을 수 있고, 사용 주파수 대역폭을 조절하여 음질을 높이거나 텍스트, 이미지도 함께 전송할 수 있습니다(DAB의 대역폭을 넓게 할당하고 데이터 압축률을 높여 동영상 플랫폼으로 만든 것이 DMB입니다). 방송 권역을 넘어가더라도 자동으로 듣던 채널을 연결지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 디지털라디오의 장점을 홍보하면서 강조했던 CD수준의 음질, 입체 음향, 기상∙교통정보 제공, 라디오커머스 등은 현실 상황과 맞지 않는, 이론적 미화로 흐른 측면이 있습니다. 음질 수준이 정해져 있는 FM과 달리 대역폭을 넓게 배정하면 CD 수준의 음질도 나오지만, 많은 채널을 배치하기 위해 대역을 쪼개다 보면 FM보다도 못한 음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상∙교통정보와 라디오커머스는 인터넷을 이용하는 경우보다 효율이 떨어지는, 즉 가능하지만 실제 경쟁 시장에선 열등한 특성이지요.

디지털라디오의 비교우위는 현실의 경쟁상황을 고려해 바라봐야 실체가 잡힙니다. DAB+방식이 실제 상용화된 홍콩과 호주에서 제가 작년 이맘때 체험해본 디지털라디오는 아래와 같은 매력이 있었습니다.

1. 사용자 편의성: ’95.9’라는 주파수가 아니라 ‘MBC Radio’같은 채널명으로 튜닝 가능. 디지털이므로 수신기에서 생방송 일시 정지나 녹음 기능 등 향상된 사용자 경험도 가능

2. 음질 수준 ・ 제공 데이터 수준 ・ 채널 수의 탄력적 운영: 섬세한 해상도가 필요한 클래식 채널은 고음질로, 음질이 중요치 않은 토크 채널은 모노로도 운영 가능. 텍스트나 이미지 등 부가정보를 많이 제공할 수도 있음. 반면 음질을 낮추거나 부가정보를 줄이고 채널 수를 늘리는 선택도 가능 (데이터양과 채널 수는 사업자의 필요에 따라 선택 가능한 trade-off 관계). 일정 기간 특정 주제로 운영하는 팝업 채널도 가능.

3. 주파수 효율성: 같은 대역폭 내에 FM보다 더 많은 데이터를 실어 나를 수 있음. 단위 대역폭 당 FM보다 더 높은 음질, 더 많은 채널 배정 가능

4. 재난 경보 활용 유리: 멀티플렉스 시스템으로서 동시 재난 알림 등을 효율적으로 운용 가능

위와 같은 비교우위들이 충분히 활용될 수 있도록 정책이 디자인된다면, 디지털라디오는 FM보다 더 많은 편익을 청취자와 방송사업자들에게 줄 수 있는 진화된 기술입니다. 그러나 ‘일방향, 대량 동시전송’이라는 매스미디어 지상파 방송의 본질은 FM과 같다는 점 또한 명확합니다.

▲ 디지털라디오 수신기(영국 Pure社 제품, 터치스크린 방식)에서 호주 시드니 지역의 채널을 선택하는 장면. 화면 오른 쪽에 선택된 채널과 프로그램 이미지, 텍스트 정보가 나타남.
한국 디지털라디오 논의의 전반전, 하프타임, 후반전

지난 15년간 이어져 온 국내 디지털라디오 논의는 시기별로 쟁점이 바뀌었습니다. 지나친 단순화라 비난하실 분도 있겠지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축구에 비유해서 전반, 하프타임, 후반으로 나눠보겠습니다.

전반전(2000년대 초반부터 DMB 대중화까지)에는 세 가지 디지털라디오 기술 표준 중 어떤 것을 택할 것이냐가 주요 쟁점이었습니다. 가장 일찍 상용화되었으나 채널 배열을 원점에서 시작해야 하는 방식(out-of-band 방식인 DAB, 주로 유럽 국가들의 기술표준)과, FM에서의 채널 배열을 유지하면서 기존 FM채널 옆에 새 디지털채널을 심는 방식(in-band 방식, 미국의 HD-Radio나 상용화 이전인 DRM)의 충돌이었지요. 예상하시는 대로 기존 FM에서의 점유율이 높거나, 신규진입자를 우려하는 측에서는 후자를, 아예 판을 처음부터 다시 깔고 싶은 측에서는 전자를 선호했습니다.

실제 논의 과정에서는 기술적 세부 사항으로 갑론을박했으나, 방송사들의 가장 근본적인 우려와 기대는 시장 점유율 변화였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이 시기 논의는 엉뚱한 외부 요인(DMB)으로 인해 하프타임을 맞습니다. 극한으로 치달았던 디지털TV 기술 표준 논란이 미국식으로 결론 나면서, 이 방식의 취약점이었던 이동 수신 문제를 해결키 위해 디지털라디오 기술을 변용, 도입하게 된 것이죠. DMB 일부 대역에 오디오 채널이 들어가면서 디지털라디오가 어중간하게나마 도입된 셈이 되었고, 디지털라디오 논의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습니다.

디지털라디오 논의 후반전을 킥오프한 것은 스마트폰입니다. 아이폰 도입 이후 불과 2~3년 만에 스마트폰이 급속하게 보급되면서, 그간 젊은층을 대상으로 세를 넓히던 라디오스트리밍(PC소프트웨어 방식)이 스마트폰앱으로 확장되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스마트폰앱을 터치하여 라디오를 듣는 비율이 높아지면서, 디지털라디오 논의 쟁점도 변화를 겪습니다. ‘디지털 전환(혹은 도입)을 전제로 기술 표준 선택’을 고민했던 전반기와는 달리, 디지털라디오 자체를 ‘할지 말지’, 즉 전제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 것입니다. 방송 방식의 디지털라디오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편익들, 또는 그 이상의 편익을 이미 사람들이 라디오스트리밍에서 누리고 있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 임재윤 MBC PD
이 논란, 소위 ‘DAB vs 스트리밍’은 현재 세계 라디오업계 공통의 고민입니다. 뉴미디어 업계 용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되겠지요. ‘라디오 OTT서비스에 의해 FM의 코드커팅(cord-cutting)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FM보다는 우수하지만 여전히 일방향 매스미디어인 디지털라디오를 도입해야 하는가?’ 후반전은 여전히 골이 나지 않은 교착상태로 또 한 해를 넘기고 있습니다. 

* 디지털라디오 이야기는 2주 후에 이어집니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