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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0|올해 26번째 맞는 input(int’l public television conference, 국제공영방송시사회, 덴마크 오루스, 5월11일∼5월16일) 중 5월15일 저녁에는 특별 세션 ‘아시아의 비전’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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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에서는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노근리 사건의 진실>(연출 홍상운)을 비롯, 중국의 펭 유가 만든 <난징 대학살>, 대만의 레 첸 린이 만든 <1955년 쿠데타>, 일본의 신스케 사카모도가 만든 <원자폭탄의 기억 그리기>를 각각 10분 요약한 비디오 클립을 시사하고 토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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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최측은 ‘공영방송이 어떻게 역사를 서술하고 개선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으로 이 세션을 기획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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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를 본 뒤 각 pd들이 약 3분 정도 발언하고 질의 응답이 이어졌다. 의외로 우리 작품에 대한 질문이 가장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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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은 프로그램의 기술적인 디테일보다는 프로그램과 현실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두었는데, 한국 역사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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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발언 : 이 프로그램을 토론하기 전에 한국의 현대사를 조금 알아야 할 거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1945년 일본에서 해방된 뒤 38선 남과 북에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했다. 노근리 사건은 1950년 전쟁 초기에 일어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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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쟁으로 남과 북의 적대감은 한층 깊어졌고, 양쪽 다 언론자유를 상실한 채 왜곡된 역사를 강요받았다. 이 프로그램이 가능해 진 건 민주화의 진전 때문이지만 역으로 이 프로그램이 민주주의와 올바른 역사 정립에 기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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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 방송 나간 뒤 미국측의 반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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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 한미합동 진상조사반이 1년 남짓 조사하고 보고서를 냈다. 학살이 있었음을 인정하긴 했지만 책임자는 가릴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클린턴 대통령이 유감 표명하고 장학재단 설립을 약속했으나 피해 유족들은 진상규명이 부족하다며 이를 거부했다. 소송이 진행중인 것으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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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그램은 진상규명에 활력을 불어넣은 측면이 있으나 미국 정부의 미온적인 대응자세를 바꾸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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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 미군이 왜 이런 짓을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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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 전쟁 초기 쫓기는 상황에서 미군이 다급한 나머지 저지른 행동이었다고 한다. 대전 전투에서 민간인 복장을 한 인민군에게 당한 일이 있고, 딘 소장이 포로가 되는 등 미군이 당황했던 건 사실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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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실제로는 다급한 후퇴 상황에서 피난민들이 작전에 방해가 되니까 상부에서 학살을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아이들과 여자오아시스를 가다 들이 많다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폭격을 하고 기관총을 쐈다. 정황이 어떠하든 학살 자체가 정당화될 수는 없는데, 미국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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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 이 프로그램을 이렇게 뒤늦게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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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 노근리 사건이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다른 수많은 학살 사건과 달리 미군이 직접 의식적으로 총을 쏘았다는 데에 있다. 미국은 한국을 공산 침략에서 구해 준 은인으로 인식되어 왔고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을 방송하는 것은 금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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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을 처음 세상에 알린 정은용씨는 1960년에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을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발표했다. 실제사실이라고 주장했다면 아마 국가보안법으로 걸렸을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뒤늦게나마 그 금기를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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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 좋은 자료들을 많이 썼는데 이 자료들을 잘 써서 앞으로 전쟁이 안 일어나게 했으면 좋겠다. 좋은 방법이 없겠는가? (성명 미상의 이태리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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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 내가 묻고 싶은 게 바로 그거다. 이 자료들을 전 세계 pd들이 많이 사용하는 것 이외에 방법이 있겠는가?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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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류의 얘기를 약 1시간 반정도 주고받았다. 역사 다큐에서 동북아 나라들의 교류 방안을 묻는 질문에 대해 nhk 사카모도 pd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토로했다. 다른 나라들은 피해자로서 자기 역사를 다루는 게 자연스럽지만, 일본은 가해자이기도 하면서 원폭피해만 해마다 되풀이 방송하는 건 너무 소극적인 것 아니냐는 질문이 나왔고, 사카모도pd는 “해석상의 이견이 존재하는 문제는 방송하기 어렵다”고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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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주고 받는 행사가 아니라 전 세계의 교양, 다큐 pd들의 모여서 프로그램을 보고 토론하는 순수한 축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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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mbc 시사교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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