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기] 역사의 가장 핫‘hot’한 그 날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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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1TV <역사저널 그날>

▲ KBS 1TV <역사저널 그날> ⓒKBS
내가 <역사저널 그날>(이하 역사저널)에 합류한지 네 달 남짓 됐을 무렵. 함께 일하는 선배들에 비해 연차도 한참 어리고 소위 말하는 역사 통(通)도 아닌 내가 과연 이대로 역사프로그램을 계속 할 수 있을 것인가. 프로그램 발령 후 적응하기 급급했던 순간들을 지나 스스로 되묻고 있었다.

그즈음, 조선 시대를 기본 축으로 해 시간 순서대로 아이템을 정하는 <역사저널>에서 내게 온 아이템은 ‘50회 병자호란’이었다. 역사에 있어 결정적인 하루를 정해 그것을 둘러싼 토크를 이어가는 프로그램 포맷 상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가장 핫hot한 날’을 정하는 것. 병자호란에 있어 가장 ‘핫한 날’은 과연 언제일까?

사전 작업을 위해 제작진은 삼전도비 촬영을 갔다. 삼전도비는 병자호란 이후 청이 조선에 항복 받은 것을 기념하고자 세운 비로, 현재 송파구 석촌 호수 부근에 세워져 있다. 그 거대한 크기 때문에 지나치는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제작진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삼전도비 스케치 촬영을 마친 뒤 시민인터뷰를 진행했다. 병자호란에 대한 일반시민의 인식과 궁금증 등을 묻기 위함이었다. 인터뷰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병자호란에 대해 질문을 하기는커녕 병자호란 자체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쓸쓸한 삼전도비 뒤로 플로렌테인 호프만의 ‘러버덕’만이 사람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 KBS 1TV <역사저널 그날> 제작 현장.
▲ KBS 1TV <역사저널 그날> 제작 현장.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모르는 게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영화 ‘명량’의 영향으로 임진왜란에 대해 사람들은 의외로 많이 알고 있었지만, 임진왜란은 난세에 영웅이 등장해 말도 안 되는 전력으로 기가 막힌 승전보를 올린 누가 봐도 드라마틱한 이야기였다. 그에 비하면 병자호란은 어느 한구석 카타르시스를 느낄 데 없이 아프기만 한, 그야말로 철저한 패전의 역사이니 누가 기억하고 싶어 하겠는가.

하지만 역사를 돌아볼 때 난세의 위기에 언제나 이순신과 같은 영웅이 나타났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정치로, 정책으로 최대한 위기를 막아내야 하는 것이 국가의 당연한 책무일 터. 똑같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굴욕에 대처하는 법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병자호란이라는 아이템을 통해서 할 일은, 당시 조선이 당한 굴욕에 충분히 비분강개하고, 한 발 멀리 떨어져 비극의 원인을 분석해보는 것일 테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 날’이 정해졌다. 비분강개의 날, 당시 사람들의 가슴에 분노와 치욕과 슬픔의 불을 지른 가장 핫‘hot’한 날. 그 날은 역시 조선의 임금이 청 태종에게 무릎 꿇어 항복하던 날이 아니던가. 당시 남한산성으로 피난해 있던 인조는 하급관리가 입는 남색 옷을 입고 정문이 아닌, 죄인이 드나드는 서문으로 길을 나섰다. 그리고 청 태종이 항복을 받기 위해 쌓아놓은 수항단 아래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아홉 번 찧는 ‘삼배구고두례’의 의식을 행한다.

이 역사의 한 장면은 제작진에게 충분히 충격적이고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제작진이 받은 ‘그 날’의 느낌이 패널들에게 충분히 전달되기만 한다면 이날의 녹화는 따로 중요한 부분을 짚어주지 않아도, 패널들이 감정을 몰입해가며 역사적 사실과 의견들을 얘기할 요소가 충분할 것 같았다.

‘그 날의 느낌’을 충실히 전달하기 위해 제작진이 선택한 것은 목각인형. 결코 화려하거나 정밀하지 않게, 오히려 항복의 날 비장한 느낌을 충실히 표현하고자 둔탁한 느낌을 살리는 게 콘셉트였다. 마리오네트 공연 하시는 분을 섭외해 인형 제작을 의뢰하고, 세트를 지어 촬영한 뒤 영상을 구성했다. 영상의 1차 시청자는 언제나 녹화 당일의 패널이다. 녹화 날, 프롤로그 영상이 끝나고 패널들은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 ‘아’하는 짧은 감탄사가 연달아 흘러나왔다. 내가 공부하며 받았던 그날의 느낌이 제대로 전달된 것 같았다.

▲ KBS 1TV <역사저널 그날> 제작 현장.
전후 청에 끌려가는 백성들의 모습을 전하는 장치로는 병자호란을 시대적 배경으로 다룬 영화 ‘최종병기 활’의 장면을 이용했다. 당시 포로가 되어 청에 끌려가면서 언제 돌아올지 모를 고국 땅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며, 남겨두고 온 부모형제를 부르짖는 백성들의 모습은 처참한 전쟁의 후폭풍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1분여 짧은 영상이었음에도 영상이 끝나고 패널들은 한숨과 눈물을 번갈아 지었다.

모든 장르를 지향하는 것은 ‘역사저널 그날’의 특징이기도 하다. 의도에 부합하기만 한다면 다큐멘터리의 한 부분이건, 드라마건, 뮤지컬이건 주제에 맞는 자료들을 가능한 한 많이 찾아서 보여주려 한다. 역사적 이야기들이 활자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튀어나와 사람들을 자극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역사적 사실들은 전문가의 사전 자문을 거쳐 충분히 고증한 뒤 꼼꼼히 대본 작업을 하지만, 그것에 공감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일은 온전히 패널들의 몫이다. 그 공감과 해석이 불타오르도록 제작진은 이처럼 ‘마음에 가장 와 닿는 그 날’과 ‘각종 소스’들을 패널에게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녹화 날 패널들은 어느 때보다 ‘그 날’과 ‘그 날’을 둘러싼 여러 상황에 공감하며 격정적인 토크를 이어갔다. 인조가 땅에 머리를 찧을 때 피가 났는지를 둘러싸고 역사적 사료를 토대로 토론했고, 당시 청과의 외교관계를 놓고 대립했던 두 신하를 자신들의 가치관에 비추어 옹호하거나 비판했다. 패널들은 여러 사료를 취사선택해 토론하고, 역사 속 인물들에 몰입하면서 점점 역사의 한 장면인 ‘그 날’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모습이야말로 역사의 대표 명제인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날 녹화에서 가장 걱정됐던 부분은 만화 조선왕조실록의 저자 박시백 화백과 만물각 코너의 서신혜 교수 출연이었다. 두 분 모두 출연에 난색을 보이셔서 제작진 읍소 하에 어렵게 섭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우였다. 일단 나오기로 한 이상, 박 화백이 누구시던가. 역사 속 수많은 ‘그 날’의 느낌과 이미지를 쉽고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가장 많이 고민하신 분이 아니던가. 박 화백은 녹화 날,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토크를 주도하셨다. 녹화를 지켜본 제작진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음 역시 만화 조선왕조실록의 저자시군!’

서신혜 교수도 분야의 손꼽히는 전문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셨다. 특히 ‘전쟁에서 이기고 지고는 정치하는 사람들에게나 중요한 것이다. 어떤 전쟁이든 거기에 휘말리는 순간 백성의 삶은 파탄 나고야 만다’는 서신혜 교수의 말씀은 제작진의 마음에도 깊이 남았다.

▲ 문지혜 KBS PD
나는 이날 녹화를 통해, 비로소 역사와 만난 게 아닌가 싶다. ‘과거와 현재의 교류’, ‘텍스트와 감정의 상호작용’,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뻔하다’고 생각했던 단어들이 내게 생명력을 가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역사저널>을 통해 역사와 만났듯, 60여 회가 계속되는 동안 사람들은 <역사저널>을 통해 역사의 이야기를 가슴으로 만나지 않았을까.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데에 사실보다 강한 힘을 가지는 건 어디에도 없을 테니 말이다.

*글쓴이 문지혜 KBS PD는 갱년기 앓는 남성 PD들 사이에서 기를 빼앗기지 않으려 애쓰는 5년차 역사 꿈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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