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를 나온 라디오, 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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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없는 라디오 시대 ①] 프롤로그

초창기에 사람들이 ‘라디오’에 대해 말할 때, 라디오는 대개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상자를 의미했습니다. 안테나와 다이얼이 달려 있는 그 상자는 몇 킬로미터, 때로는 수천킬로미터까지 떨어진 곳에서 보내오는 지상파를 수신하고 그 신호를 소리로 바꿔서 들려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50년대에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등장하면서 라디오는 휴대용 기기가 됐습니다. 하지만 그 크기가 작아졌을 뿐, 지상파를 수신해 소리를 들려주는 핵심적인 기능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라디오는 점점 더 작아졌습니다. 80년대 초에는 모자 안에 라디오가 들어갔고, 90년대에는 카드형 라디오가 등장했습니다. 지금은 아주 작은 칩 하나로도 같은 기능을 할 수 있게 됐고, 그래서 이제는 라디오가 어떤 모습이라고 말하기가 애매해졌습니다. 지금의 라디오는 어떤 상자가 아니라 ‘라디오의 기능’을 하는 장치를 말합니다.

그동안 라디오 방송사들이 터를 잡고 있는 부분이 바로 그 기능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수신기가 무엇이든, 지상파의 특정 부분(주파수)을 독점적으로 이용해 송신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방송사들은 그 주파수에 어떤 콘텐츠를 실어 보낼 것인가를 고민하면 됐습니다. 그 주파수라는 것이 한정된 재화였기 때문에 허가 받은 방송사들은 어느 정도 독과점적인 지위를 누리면서 꽤 많은 청취자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근본적인 토대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탁자 위의 상자’가 아니게 된 것처럼, 지금의 라디오는 ‘안테나를 통해 전해지는 전파’라는 정의에서도 급속하게 벗어나고 있습니다.

TV는 이미 그러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TV는 오랫동안 송신탑을 통해 전파를 보냈고 각 가정의 TV에는 그 전파를 잡기 위한 안테나가 있었지만, 얼마전부터 TV는 케이블이나 위성이나, 이제는 인터넷 회선을 통해 가정으로 갑니다. TV에 달려 있는 안테나는 거의 사용되지 않습니다.

라디오 역시 같은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지상파가 아닌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해 라디오를 듣고 있습니다. 차에서는 여전히 FM 주파수를 통해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이 대다수지만, 언제나 네트워크에 연결되는 ‘커넥티드 카’가 속속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이마저도 곧 변하게 될 것입니다.

라디오는 적은 비용으로 콘텐츠를 만들어 많은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면에서 어떤 매체도 따라올 수 없는 강점이 있었습니다. 100여년 전에 처음 등장한 후로 라디오는 가장 쉽게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오디오 매체로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과 모바일 환경을 자랑하는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청취자가 굳이 지상파 라디오를 선택해야 할 이유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인터넷이든 모바일이든, 청취 환경이 아무리 바뀌더라도 우리 방송을 계속 들어주기만 한다면 별 문제가 없을텐데, 냉혹한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꽤 오래 전부터 나름의 청취자를 확보하고 있는 인터넷 방송들은 차치하더라도, 손쉽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각종 스트리밍 서비스, 점점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며 우리의 귀를 잡아끌고 있는 팟캐스트, 심지어 오디오 뉴스 서비스와 오디오북까지, 인터넷을 기반으로 등장한 수많은 경쟁자들이 ‘한정된 들을 시간’을 놓고 다투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라디오는 가장 효과적인 오디오 매체라는 위치에서 끌려 내려오고 있습니다. 라디오 방송사들은 더 이상 독과점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동안 라디오가 다른 라디오와 경쟁을 해왔다면, 이제 라디오는 세상의 모든 오디오 콘텐츠와 경쟁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상파 라디오 광고는 계속 줄어들고, 머지않아 광고 매출의 절벽이 온다는 암울한 전망들이 속속 들려옵니다.

하필 이런 시점에 라디오 방송사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 라디오 PD들, 자신의 비운을 탓하며 손 놓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불행 중 다행이랄까, 외국에서는 ‘라디오 없는 라디오의 시대’에 라디오 산업이 오히려 더 성장한 사례도 있고, 변화 속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낸 사람들도 있습니다.

▲ 유창수 CBS PD

이 연재를 통해 지난해에 CBS 창사 6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라디오, 날개를 달다>를 준비하면서 들었던 이야기들, 취재를 통해 살짝이나마 엿보았던 노하우들을 남김없이 모두 나누려고 합니다. 개인이나 한 방송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라디오 전체의 지혜와 힘이 모아진다면 위기를 넘어 새로운 도약도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연재가 수많은 고민과 토론으로 이어지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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