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재의 詩詩한 이야기] 치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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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염 한 포대, 베란다에 들여놓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누런 간수 포대 끝에서 졸졸 흘러내립니다. 오뉴월 염밭 땡볕 아래 살 태우며 부질없는 거품 모두 버리고 결정(結晶)만 그러모았거늘, 아직도 버릴 것이 남아 있나봅니다.

치매 걸린 노모, 요양원에 들여놓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멀쩡하던 몸 물먹은 소금처럼 녹아내립니다. 간수 같은 누런 오줌 가랑이 사이로 줄줄 흘러내립니다. 염천 아래 등 터지며 그러모은 자식들 뒷짐 지고 먼 산 바라볼 때, 입 삐뚤어진 소금 한 포대 울다가 웃었습니다.

-박후기 <소금 한 포대> 전문

ⓒpixabay

10년쯤 지난 일이다. 새로 지은 파주의 어느 요양원을 찾아갔다. 정원에는 봄 햇살이 빽빽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시의 표현처럼 노인의 몸은 정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제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도 없게 된 몸, 뼈와 살갗 사이에 최소한의 근육만 남아있었다. 안쓰럽게 바라보는 자식들에게 노인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왜 그리 사람을 빤히 보는교?” 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관심이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자식들은 헛헛한 웃음을 웃었다.

노인의 한 쪽 눈꼬리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기쁨이나 슬픔은 조금도 녹아있지 않은 눈물, 단지 눈물길이 막혀 역류하는 액체였다. 슬픔은 외려 그 눈물을 닦아주는 엄지손가락에 어려 있었다.

나는 노인의 뒤에 서 있었다. 아이가 된 어머니와 노인이 되어가는 자식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관리’를 위해 짧게 깎였을 백발 사이로 선명한 가마가 눈에 들어왔다. 노인의 작은 머릿속에는 한 평생 기억이 아직 생생히 남아있을 것이다. 단지 기억을 불러오는 회로가 깜깜해졌을 뿐……. 더는 호출되지 않는 기억들 속에 이런 장면도 있었을까?

 

곤충채집 할 때였다.

물잠자리, 길앞잡이가 길을 내는 것이었다.

그 길에 취해 가면 오 리 길 안쪽에

내 하나 고개 하나 있다.

고개 아래 뻐꾹뻐꾹 마을이 나온다.

그렇게 어느 날 장갓마을까지 간 적이 있다.

장갓마을엔 누님이

날 업어 키운 큰 누님 시집살이 하고 있었는데

삶은 강냉이랑 실컷 얻어먹고

집에 와서 으시대며 마구 자랑했다.

전화도 없던 시절,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느그 누부야 눈에 눈물 빼러 갔더냐며

어머니한테 몽당빗자루로 맞았다.

다시는 그런 길

그리움이 내는 길 가보지 못했다.

-문인수 <눈물> 전문

ⓒpixabay

철없는 아들을 때리며 어머니도 눈물을 삼켰을 것이다. 이 어머니가 요양원 노인이라면, 그는 이제 그런 기억이 있었는지조차 모른다. 그는 기억 때문에 아파하지는 않는다. 평생을 따라다니며 괴롭히던 비밀스러운 기억이 있었다면 노인은 그 손아귀에서도 놓여났다. 노인에게 치매는 이승을 떠나기에 앞서 치르는 기억의 장례 같은 것이었을까?

노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아들, 딸들에겐 ‘그리움이 내는 길’을 따라 어머니가 문득문득 찾아왔을 것이다. 그날 자식들은 요양원 정원에서 노인 곁에 오래 앉아 있었다. 대꾸를 기대하지 않은 말을 가끔 건네면서, 무심히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면서…….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 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 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김사인 <조용한 일> 전문

 

가만히 있는 것 말고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이 늘어만 간다. ‘그냥 있어 볼 길밖에 없는’ 때에는 걱정해주는 눈길마저 아프다. 곁에 슬며시 앉아 ‘말없이 그냥 있는’ 사람들, 그들도 ‘그냥 있어 볼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만히 앉아 있는 노인과 그 곁에 그냥 앉아 있는 자식들, 그들을 보며 가만히 있었던 나도 ‘그냥 있어 볼 길밖에’ 없었다. 그날 이런 생각을 했다. 언젠가 나도 휠체어 옆에 앉아, 혹은 휠체어에 앉아, 말없이 그냥 있을 날이 올 것이라고……. 그날의 나에게, 또 내 눈물을 닦아줄 어느 슬픈 엄지손가락에게 미리 이 말을 건네어 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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