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대필' 강기훈 24년 만에 무죄 확정…‘조선일보’ 사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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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안몰이 수사 두둔, "죽음 선동 세력 존재" 근거없는 박홍 발언 동조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 불리던 ‘유서대필 사건’의 주인공 강기훈씨의 무죄가 24년 만에 확정됐다.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14일 자살 방조 혐의로 기소된 강기훈씨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강기훈씨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이하 전민련) 동료였던 김기설씨가 1991년 5월 8일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면서 분신했을 때 유서를 대신 써주고 자살을 방조한 혐의로 기소됐고 1992년 징역 3년 형 확정에 따라 복역했다.

1991년은 당시 노태우 정권에 대한 저항이 거셌던 시기로 그해 4월 명지대생 강경대씨가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고 이후 노태우 정권의 폭압에 항거하는 학생들의 분신이 이어졌다. 때문에 공안당국이 정국 반전을 위해 의도적으로 강기훈씨 유서대필 사건을 조작했다는 의혹이 당시에도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이런 의혹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동원해 강기훈씨의 필적과 유서의 필적이 동일하다는 감정 결과를 내놓고 강기훈씨를 구속 기소했으며, 이듬해 법원은 징역 3년 형을 선고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일보> 등의 보수언론은 이 사건을 민주화 운동 세력에 대한 도덕성 공격의 발판으로 삼았다. 오늘(14일) 대법원이 무죄 확정 판결에 여론이 당시 이 사건을 만들고 키웠던 사법부와 언론에 주목하는 이유다.

▲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유서대필 사건' 강기훈(51)씨가 지난해 2월 13일 오후 서울 서초동 중앙지법에서 열린 재심 선고공판을 마친 후 기자회견을 갖고 소회를 밝히고 있다. 서울고법 형사10부(부장판사 권기훈)는 이날 강씨의 자살방조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1991년 5월8일 서강대 건물 옥상에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이던 김기설씨(당시 25세)가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분신 자살하자 검찰이 전민련 총무부장이던 강씨가 유서를 대신 써주고 자살을 방조했다며 사법처리한 사건이다. ⓒ뉴스1

우선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있다.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김 전 실장은 이 사건의 수사를 지휘했고, 이후 국회의원을 거쳐 얼마 전까지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맡는 등 승승장구했다.

수사에 직접 관여했던 검사는 9인으로, 당시 정구영 검찰총장은 지난 대선 당시 244인의 법조인과 함께 박근혜 대통령 지지를 공개 선언했으며, 강신욱 당시 부장검사는 이후 대법관까지 지낸 후 2007년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선후보 캠프에서 법률지원특보단장을 맡았다. 또한 당시 수석 검사였던 곽상도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은 박근혜 정부 인수위원회를 거쳐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냈다. 그 외 검사들도 출세가도를 달리며 새누리당에 공천을 신청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언론들도 당시 검찰 발표를 받아쓰며 공안몰이에 앞장섰다. 김기설씨 분신 당일이었던 5월 8일 박홍 서강대 총장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지금 우리사회에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며 “이 세력의 실상을 반드시 폭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조선일보>는 즉각 화답했다. 같은 해 5월 10일자 신문 3면에 게재한 사설 ‘박홍 총장의 경고’에서 “그(박홍 총장)의 말대로 최근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자살 소동에는 무언가 자연스럽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은 의문점이 개재한다는 점을 강하게 느낀다”며 박 총장의 근거 없는 주장에 힘을 실었다.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운동권 학생들에 동조해서 가두시위를 하고 구호를 외쳐대는 교수들이나, 시국선언에 서명하는 교수들이 행세하는 사회”라며 “민주화 시대라면서, 민주 개혁을 추진해야겠다면서 이른바 운동권은 집단으로 자신과 다른 견해에는 재갈을 물리고 대신 자신들의 주장에만 동조해야 한다고 강압하고 있다”고 민주화 운동 세력을 싸잡아 비판했다.

<조선일보>는 이어 “그런 세태 풍조 속에서 박 총장의 발언은 더욱 의미 있는 것”이라고 재차 의미를 부여한 뒤 “자살과 시신을 이용해서 목적을 달성하려는 죽음의 세력이 있다면 생명의 존엄성을 유린하는 점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앞서도 <조선일보>는 1991년 5월 5일자 신문 3면에 김지하 시인의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글을 게재하는 등 민주화 운동 세력에 대한 마녀사냥을 했다.

그러나 지난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유서의 필체가 강씨가 아닌 김씨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에 강기훈씨는 곧바로 재심을 청구했지만 대법원은 4년여만인 2012년 10월 재심 개시결정을 내렸다. 국과수는 지난 2013년 12월 유서 필체에 대해 강씨 필적이 아니라는 새로운 감정 결과를 내놨고, 2014년 2월 13일 서울고등법원은 이를 토대로 강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당시 가해자들은 사과하지 않았고 <조선일보>는 다음날인 2월 14일자 신문 12면에서 2단짜리 기사로 재판 결과를 전달하는 데 그쳤다.

▲ 강기훈 쾌유와 명예회복을 위한 시민모임 회원들과 변호인들이 14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유서대필 사건 강기훈 씨 무죄 확정판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이날 자살방조 혐의 등으로 기소돼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던 강씨가 낸 재심 사건에서 자살방조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뉴스1

이런 가운데 이날 대법원의 강기훈씨에 대한 무죄 판결 직후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유서대필 사건’ 강기훈. 24년 만에 살인방조죄 무죄판결. 그러나 강기훈은 간암 투병 중. 강기훈을 패륜아로 몰았던 언론과 보수인사들, 수사와 기소를 밀어부친 검사, 유죄판결을 내린 법관 등 이제라도 무릎을 꿇어라”라고 주장했다.

새정치민주연합 민주평화국민연대 소속 의원들도 대법원의 무죄 판결에 대해 환영의 뜻을 표시했다. 새정치연합 노영민, 인재근, 최규성, 진성준 의원은 이날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거대한 공안 조작극의 실체가 24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밝혀진 것에 대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사건의 조작에 관여한 인사들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언젠가 제2, 제3의 강기훈이 나올 수 있다”며 “공소시효가 지나 형사적 책임을 추궁할 순 없어도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상정 정의당 원내대표도 이날 오후 논평을 내고 “만시지탄의 심정이지만 환영한다. 사필귀정의 역사적 준엄함을 새삼 느낀다”고 밝혔다. 심 원내대표는 “당시 법무부장관이었던 김기춘씨는 이 사건의 수사를 지휘하며 공안정국을 주도했던 당사자로서 가장 큰 책임을 짊어져야 할 장본인”이라며 “이 사건의 수사와 재판을 했던 장본인, 그리고 사법기관은 모두 석고대죄의 심정으로 강기훈씨와 국민 앞에 사과해야 한다. 최소한의 도리”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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