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의 광주를 기억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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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민 PD의 끼적끼적]

<100% 베를린>이라는 연극이 있다. 어딘지 현학적이거나 현대사적일 것 같은 냄새가 문득 나는 이 제목은 사실, 정말로 딱 문자 그대로의 의미만 지닌다. <100%베를린>은 ‘통계연극’이다. 무대 위에는 정확히 100명의 베를린 시민이 등장한다. 전문 배우도 아니고 따로 연기 훈련을 받은 적도 없는 이 사람들이 섭외된 기준은, 한 명 당 베를린 인구사회학적 통계의 1%에 해당하는지 여부이다. 베를린의 인구 성비가 남성이 52%라면, 무대 위의 100명 중 52명은 남성이다. 10대 미만의 아동이 5%라면 무대 위에는 다섯 명의 아이들이 서 있을 것이며, 이들을 보살피기 위해 함께 선 부모들도 역시 각각 베를린 인구통계의 1%를 담당한다.

이렇게 100명으로 축소된 무대 위 100%의 베를린 시민들은, 한 명씩 자기소개를 하기도 하고, 24시간 동안 각자의 일과를 재현해 보이며 베를린의 살아있는 하루를 선명하게 보여주기도 하다가, 여러 정치사회적인 질문들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답함으로써 베를린 여론을 시각적으로 구현해내기도 한다. 독일의 아티스트 그룹 리미니 프로토콜(Rim ini Protokoll)은 베를린을 시작으로 한 이 통계연극의 무대를 세계 각국의 도시들로 바꾸어가며 확장해나가고 있다.

▲ 연극 ‘100%의 광주’ ⓒ 아시아문화재단

실로 생소하면서도 창의적인 연극이다. 그러니 작년 5월, 내가 <100% 광주>를 관람하러 가는 길에 자연스럽게 5.18을 기대한 것은 무지했던 까닭만으로 돌리기엔 조금 억울하다. 아마 이 프로젝트를 알고 찾은 사람이 아니라면, 관객 대부분이 그랬을 것이다. <100% 광주>라는 강렬한 제목, 그리고 5월. 실제로 공연 중간에는 무대 위의 광주 시민들이 객석에 앉은 관객들에게 질문을 건네는 순서도 있었는데, “나는 이 공연이 5.18에 대한 내용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왔다”라는 질문에 관객 대부분의 손이 올라갔다. 우리에게 광주는 그렇게 읽힌다.

공연 제목 <100% 광주>에서는 전라도에 있는 어느 행정구역 이상의 의미로 쓰이지 않았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광주’란 두 글자는 한 단어가 가질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뛰어넘은 맥락과 집단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바로 이 광주를, 여느 도시들과 똑같이 그저 사람들이 살고 있는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무대 위에 올린 <100% 광주>는, 역설적으로 그 순간 또다시 새로운 함의를 갖게 됐다. 공연 중 무대 위 100명의 광주 시민들에게 주어진 질문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나는 광주가, 이제는 5.18의 이미지로부터 벗어나 좀 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하고 바란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무대 위의 꽤 많은 손이 올라왔다.

해직언론인이라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명찰을 달게 된지 꼬박 네 달이 지났다. 해고의 부당함과는 상관없이, 개인으로서는 굉장히 잘 지내고 있다. 여가 없고 휴일 없는 생활에서 내 시간을 온전히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생활로 건너 왔으니 윤택함이 더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회사에 소속된 신분이기에 할 수 없었던 콘텐츠에 대한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는 자유도 생겼으니 의미도 충만한 시간이다. 회사 경영진의 비상식적인 행태와 대응을 생각하면 당연히 화가 나지만, 내 개인적으로 이 시간이 고되냐 묻는다면 그건 전혀 아니다.

그런데 이걸 믿어주는 사람이 드물다. 해고 상황을 알고 격려해주려는 분들이 가끔 안부를 물어 오실 때, 밝은 목소리로 굉장히 잘 지내고 있다고 대답하면, ‘그래도 네가 말 못하는 힘든 게 많이 있겠지...’ 하는 측은지심 어린 눈빛이 돌아온다. 써주시는 마음이야 감사하지만 가끔은 아, 고난 받고 있는 해직자 모드라도 한 번씩 구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의무감마저 생길 지경이다.

시비 여부를 떠나 개인적으로는 광주라는 지명 위에 반사적으로 5.18을 입히는 것을 경계하려는 편이었다. 어찌됐든 그 역시 또 하나의 편견이 아닌가. 물론 편견이 모든 경우에 틀린 것은 아니다. 꽤 많은 경우, 편견은 사실에 뿌리를 깊이 박았다. 다만 그 사실이 엉뚱한 곳에 가지를 칠 때 편견이라는 열매를 맺는 것이다. 광주에 5월이 덧입혀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이제 겨우 한 세대를 지나왔을 뿐이다.

▲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진압군이 한 시민을 연행하던 중 곤봉으로 구타하고 있다.

5월 즈음 광주를 찾으면 약속이나 한 듯 집집마다 차려진 제사상 앞에서 광주 사람들은 여전히 35년 전의 현재를 산다. 대학에서 만난 광주 출신 친구들의 입에서, 자신이 나온 고등학교에서는 민주주의와 정치사회를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기에 학문의 전당이라는 명문대에 오면 훨씬 더 깊은 고민들을 만나게 되리라 기대했다는, 한없는 실망감에 젖어있는 목소리를 들을 때면 내가 경계하려 했던 편견이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 것인가를 실감하기도 했다.

하지만 5월은 여전히, 100%의 광주는 아니다. 우리는 5.18을 기억해야 한다. 이 기억에 흠집을 내려는 사람들에게는 부단히 맞서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 우리의 사회 안에 여전히 살아 있는지 쉼 없이 되짚어 가는 것이, 그 기억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광주라는 도시는 그 5월의 기억 안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다. 5.18의 상처가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말하는 연극 <푸르른 날에>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것 역시 좋은 경험이지만, <100% 광주>의 무대를 만났을 때도 낯설어 할 필요는 없다.

실은 광주 뿐 아니라, 현재로 끊임없이 지고가야 하는 수많은 기억들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마치 내가 ‘해직언론인’이라는 이름표 아래 ‘조금은 괴로운’ 모드를 개발해내야 할 것 같은 부담을 느끼는 것처럼, 집단의 기억과 그에 대한 부채감은 때로 오해를 낳기도, 자칫 왜곡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당사자들이 원치 않는 순간에도 그 멍에를 강요할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나는 광주를 말할 때마다, 5.18의 기억으로부터 조금은 벗어나고 싶다며 들어 올린 <100% 광주> 무대 위 손들이 떠오른다. 광주와, 집단의 모든 숭고한 기억들을 되새기는 순간들이, 언제나 100%를 향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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