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도시농부가 본 ‘도시농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현장] KBS ‘인간의조건-도시농부’ 옥상텃밭 탐방기

지난 5월 어느 토요일 밤. 동생과 늘어지게 누워 TV 채널을 돌리던 나는 벌떡 일어나 자리를 고쳐 앉았다. “저게 뭐야? 헐. 도시농부 프로젝트래.” “어? 옥상텃밭? 우리가 하는 거잖아?” 멍하니 TV를 보던 우리는 그 날부터 KBS <인간의 조건-도시농부>를 ‘본방 사수’하는 시청자가 되었다.

▲ KBS <인간의 조건-도시농부> ⓒKBS

<인간의 조건-도시농부>는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윤종신, 조정치, 최현석, 정창욱, 정태호, 박성광 여섯 멤버가 농사를 짓는 모습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이 나를 사로잡은 것은 나 역시 도시농부이기 때문이다. 나는 홍대 인근 옥상텃밭에서 동생과 함께 농사를 짓고 있는 도시농부다. 사실 올해 갓 농사를 시작한 초짜 도시농부이지만,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도시한복판 빌딩 숲 사이에서 열심히 ‘초록’을 가꾸는 중이다. 농사는 요즘 내 일상의 가장 큰 ‘힐링’이기도 하다.

그런데 TV 속 그들도 나처럼 도시에서 농사를 짓겠다고 하고 있었다. 농사를 휴대폰 게임으로나 해봤던, 작물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도 모르던 사람들이 무작정 농사를 시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조건> 멤버들은 걱정을 하면서도 아이를 위해, 셰프로서의 욕심 때문에, 혹은 중년의 로망으로 농사를 시작했다.

나는 궁금했다. TV 속 저 텃밭이 실제로 보면 어떤 모습일지. TV에는 미처 다 나오지 못한, 카메라 뒤 풍경은 어떤 모습일지. 과연 저 연예인들이 정말 진지하게 책임감을 갖고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인지. 그래서 찾아가 봤다. <인간의 조건-도시농부> 촬영현장인 그곳, 영등포구청 별관 옥상텃밭으로.

지난 7일 오후 4시. 옥상텃밭을 찾은 그 날은 무덥고 습한 날씨였다. 땀을 흘리며 계단을 오르니 신세계가 펼쳐졌다. 100평 정도 넓이의 옥상 가득 텃밭이었다. 흙냄새, 풀냄새가 물씬 풍겼다. 나도 옥상에서 텃밭농사를 짓고 있지만, <인간의 조건>팀이 조성한 옥상텃밭은 독특하다. 일반적으로 옥상에서는 상자텃밭으로 농사를 짓는데 <인간의 조건>은 바닥에 흙을 깔아 노지 같은 텃밭을 만들어냈다. 흔히 옥상에서 짓는 농사와 노지에서 짓는 농사는 다르다고들 하는데, <인간의 조건> 옥상텃밭은 그 두 가지를 합쳐놓은 형태인 셈이다.

▲ 아파트 빌딩 숲 사이에서 벼가 자라고 있다. ⓒ김성헌

이 텃밭에서 특히 눈에 띈 것은 역시 논이었다. 쌀농사를 짓겠다는 최현석 셰프의 고집으로 만들어진 논. 최근 방송된 프로그램에서는 이제 겨우 모를 심는 모습이 나왔는데, 실제로 본 논에서는 벼가 이미 쑥쑥 자라 키가 커 있었다. <인간의 조건> 멤버들은 모두 논에 들어가 열심히 피를 뽑고 있었다. 도심에서 논을 찾아보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인데, 빌딩 숲 사이 옥상에서 논을 보니 낯설었다.

멤버들은 땡볕에서 열심히,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열심히는 일하는데,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야, 우리가 피인 줄 알고 뽑은 거 80%가 벼야! 망했어!” 투덜투덜. 멤버들은 뭐가 벼인지 뭐가 피인지 몰라서 우왕좌왕하더니 급기야는 논쟁을 벌였다. 스마트폰으로 검색도 해봤지만 헷갈리기는 매한가지. 제작진도 잘 알지 못해서 모두가 갈팡질팡했다. 누구 하나 자신 있게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저렇게 해서 벼농사 성공할까?’ 스멀스멀 걱정이 올라오는 찰나, 개그맨 정태호가 가뭄에 죽은 우렁이를 건져내곤 허탈하게 웃었다. 프로그램이 늘 ‘리얼’을 강조하지만, 내심 ‘그래도 전문가 한 명쯤은 와 있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상상 이상으로 리얼한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다. 일을 하고는 있는데 이게 제대로 하는 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꼭 내 모습 같았다.

▲ 빗물 저금통에 페인트칠을 하는 멤버들. ⓒ김성헌

멤버들은 이날 새벽 5시부터 모여 강원도에 다녀온 참이라고 했다. 서울에 도착해서는 오후 3시 반부터 바로 피 뽑기에 돌입한 강행군이었다. 하지만 지친 기색 없이 다들 ‘초열심’, ‘초집중’ 모드로 농사일에 임했다. 말도 거의 없이 너무 열심히 일을 해서 ‘저렇게 방송해도 되나? 방송분량이 나오나?’ 걱정이 될 정도였다.

“촬영은 언제까지 하나요?” 조심스럽게 묻자, 제작진은 “기약 없어요. 일을 다 끝마쳐야 가는 거죠, 뭐”하고 ‘쿨’ 하게 대답했다.

▲ 텃밭을 돌보는 멤버들. ⓒ김성헌

멤버들이 일하고 있는 논에서 벗어나 텃밭을 둘러봤다. 쌈 채소와 각종 허브, 가지 등 익숙한 작물들도 많았지만, 낯선 작물도 보였다. 다양한 품종을 시도하는 도시농부들 사이에서 텃밭을 가꾸다 보니 나도 시중에서는 보기 힘든 작물들을 많이 접한 편이었는데, 그런 내 눈에도 신기한 작물들이 있었다. 방송에서 보고 놀랐던 스태비아, 마이크로 토마토, 사랑초 등의 작물이었다. 제작진이 맛보라고 준 스태비아를 씹으니 사카린처럼 강렬한 단맛이 느껴졌다. 사랑초는 새콤하니 과일 맛이 났다. 작물의 세계는 무궁무진하구나. 두 작물을 내 마음속 ‘내년에 심을 목록’에 추가했다.

텃밭을 둘러보면서 가장 재미있었던 건, ‘망한’ 작물들을 발견하는 일이었다. 말라서 시들시들 죽어가는 작물, 웃자라서 먹을 수 없게 된 작물, 벌레 먹은 작물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사실 일주일, 아니, 며칠만 소홀해도 시기를 놓치는 게 농사다. 관리해야 할 시기를 놓친 작물을 보니 안타까우면서도 웃음이 났다. 내 텃밭의 작물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멤버들에게 깊은 유대감을 느낀 순간이었다.

제작진은 그런 ‘망한’ 작물들 때문에 욕도 많이 먹었다고 했다. “작물이 저 지경이 되도록 제작진은 대체 뭐했냐”는 비난들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조건>은 처음부터 “욕먹자”는 마음으로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전문가가 있다면 훨씬 수월하게 해나갔겠지만, 우리가 생각한 건 함께 배워가며 짓는 농사였어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시청자분들에게 많이 혼나서 욕먹고 참견받자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죠. 그래서 제작진이나 외부인력의 도움 없이 오롯이 멤버들의 힘으로만 농사를 짓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잘 길러진 작물을 잘 먹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좌충우돌해가며 모든 것을 직접 해 보는 프로그램이니까요.”  

▲ 울창한 작물들 너머 윤종신이 텃밭을 돌보고 있다. ⓒ김성헌

식사 시간이 다가올 때쯤 논 작업을 끝낸 멤버들은 팀을 나눴다. 최현석과 정창욱은 식사를 담당했고, 윤종신은 텃밭 정리를 했다. 나머지 멤버들은 다가올 장마에 대비해 ‘빗물 저금통’을 만들기 시작했다.

윤종신은 텃밭에 물을 주면서 병충해 걱정을 했다. 벌레 먹은 작물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모습이 그렇게 친숙할 수가 없었다. 이어서 셀러리를 수확하고 토마토 순지르기를 하던 윤종신은 텃밭 구석에 심어진 피망에 열매가 열린 것을 보고 반가워했다. 딸 라오가 심은 피망이라고 했다. 원승연 PD는 “윤종신의 아이들 ‘라라라’(라익·라오·라임) 세 명이 엄마랑 직접 피망 모종을 사 와서 심고 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라오한테 갖다 줘야겠다!” 피망을 따는 윤종신의 표정이 신나 보였다. 그에게 이 텃밭 농사는 이미 방송이 아닌 취미생활이 된 듯했다.

빗물 저금통을 만드는 모습도 신기했다. <인간의 조건> 팀은 장마철 내리는 비를 모아 두었다가 농사에 쓸 것이라고 했다. 다른 텃밭에 견학을 가서 배워온 것이라는데, 앞으로 어떻게 활용할지 기대가 됐다.

▲ 노동 후 식사는 꿀맛이다. 두 셰프가 만든 비빔국수를 먹는 멤버들. ⓒ김성헌

그리고 최근 방송계에서 떠오르는 ‘핫’한 두 셰프의 요리하는 모습을 직접 구경하는 영광을 얻었다. 두 사람이 뙤약볕에서 땀 흘리며 농사를 짓는 모습은 누구보다 진지했다. 멤버들 중에서도 가장 열심히 일했고, ‘허세’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요리할 시간이 되자 달라졌다. 방송에서만 보던 예의 그 ‘허세’를 눈앞에서 직접 봤다. 비닐장갑을 껴도 멋스럽게! 그렇게 만든 비빔국수를 멤버들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먹었다. 농사일 후에 먹는 음식은 꿀맛인 법. 다들 열심히 먹었다.

식사를 하며 멤버들은 앞으로의 농사계획을 논의했다. 이제 곧 장마철이 다가올 것이고, 그 이후에는 김장을 위한 농사를 짓게 된다. 멤버들은 각자 만들고 싶은 김장김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갓김치, 섞박지, 동치미, 배추김치···. 각자 원하는 김치에 맞는 작물을 심고 농사를 지을 예정이라고 했다. 원승연 PD는 “김장의 전 단계부터 마지막까지 전 과정을 볼 수 있을 것”이라며 “그렇게 6개의 각기 다른 김치가 탄생했을 때, 고기를 삶고 김칫소를 올려서 김장 잔치를 할 때, 그때 터져 나올 감정들을 담고 싶다”고 말했다.

▲ 멤버들과 제작진이 도시농부 장터에 참가할 계획을 논의하고 있다. ⓒ김성헌

멤버들은 조만간 도시농부들의 장터, ‘파머스 마켓’에도 나가볼 생각이라고 했다. 팔 수 있는 작물은 무엇이 있을지, 작물로 뭔가를 만들어서 팔 수는 없을지를 논의했다. 나도 올해 ‘파머스 마켓’에 참가할 생각을 갖고 있었던지라 귀를 쫑긋 세웠다. 장터에서 만나면 참 반갑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최현석 셰프가 만들 바질 페스토가 기대됐다!

멤버들은 나처럼 실패하기도 하면서, 서툴지만 열심히, 재미를 느끼며 농사를 짓고 있었다. ‘과연 저 연예인들이 ‘리얼’ 하게, 오롯이 텃밭을 책임지며 가꾸고 있는 것일까’ 하던 의구심은 말끔히 사라졌다. 멤버들은 프로그램을 만든다기보다는 그냥 하나의 취미를 더 갖게 되었다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었다. 왜냐면 농사일은 재미있으니까!

그런데 프로그램 이후 이 텃밭은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프로그램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언젠가 프로그램이 끝이 났을 때 이 텃밭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원승연 PD는 “언젠가 프로그램이 끝이 나면, 이 공간은 영등포 구민들에게 다시 돌려드릴 생각”이라고 말했다. 구민들을 위한 옥상텃밭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이란다. 실제로 지금도 촬영현장에는 데이트하는 커플, 동네 주민들이 종종 찾아온다고 한다. 제작진은 촬영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는 텃밭을 보여주고 있다.

“다들 한마디씩 하고 가죠. 저거 저렇게 키우면 안 되는데, 순지르기 해야 하는데, 빨리 물 줘야 할 텐데. 이렇게요. (웃음) 결국 이 프로그램은 그 맛인 것 같아요. 저희는 많은 분이 참견해주시고 욕해주시길 바라고 있죠.”

▲ 텃밭을 돌보는 멤버들. ⓒ김성헌

언젠가 한 할리우드 배우가 서울의 빌딩 숲을 찍은 사진을 SNS에 게재한 적이 있다. 외국인들은 그 사진을 보고 “환상적이다”, “이상적인 도시다”, “아름답고 멋지다” 등 극찬의 댓글들을 달았다. 빌딩 옥상에 발라놓은 초록색 방수페인트를 정원으로 착각한 것이었다. ‘웃픈’ 이야기다. 녹지율이 전국에서 가장 낮다는 서울. 그 방수 페인트의 녹색이 식물의 녹색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인간의 조건>에서도 옥상을 두고 ‘도시의 휴경지’라는 표현을 썼지만, 정말 서울에는 옥상이라는 아까운 공간이 수도 없이 방치되어 있다.

빌딩과 아스팔트 속에서 살아가는 도시 사람들이 그렇게 작게나마 각자의 텃밭과 정원을 갖게 된다면, 도시 사람들이 멤버들처럼 농사라는 새로운 취미를 갖게 된다면 이 삭막한 도시의 풍경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나 같은 도시농부뿐 아니라 농사의 ‘농’자에도 관심 없던 사람들도 조금이나마 녹색을 가꾸는데 흥미를 갖게 된다면. <인간의 조건>이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작은 기대를 해본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