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은 그것을 하기 전까지 결코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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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우선 PD의 행복한 오타쿠]

ⓒpixabay

나는 팔자가 좋아서 취미에 목숨을 건 게 아니다. 가끔 어떤 이들은 나의 호사스런 음악실을 보고 “물려받은 재산이 많은가요?”라는 질문을 한다. 나는 물려받을 재산이라곤 하나도 없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동기들 중 가장 적은 용돈을 받으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림을 잘 그려 미대에 갈 뻔 했는데, 초중고를 거치는 미술반 생활동안 동기들에게 다 있는 이젤이 내겐 없었다. 이젤대신 합판을 잘라 집구석에 있던 도배지를 발라서 미술실 벽에 다리도 없이 세워놓고 그림을 그렸다. 물감도 그 좋다는 신한물감 36색을 사지 못하고 값싼 모나미 12색 물감을 이겨 색을 조합해야 했다. 36색 물감을 가진 친구나, 형편이 더 좋아 전문가용 64색을 가진 친구는 나보다 수월하게 색을 조합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화가나 작가가 되려했으니 공부에 취미를 들이지 않아 미술대회나 백일장만 돌아 다녔다. 대회에 나갈때마다 상을 받았지만 그림은 갈 길이 아니었나 보다. 이후 미대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가까스로 신문방송학과에 턱걸이하여 대학생활은 사진기를 메고 돌아다니며 재미있게 보냈다. 고교 2학년때 미술대신 시작한 사진이 취미라 대학졸업 때까지 신나서 돌아다니며 동아리 활동을 했고 이러구러 그리던 방송PD가 되었을 때 배워둔 사진은 촬영이나 편집에 아주 유용한 무기가 되었다. 프로그램도 내가 전문가 수준에 오른 여러 가지 취미에서 착안한 게 많았다. 잘 아는 분야를 깊이 취재하니‘물건’이 될 수 있었다. 모르는 분야는 나서지 않았다.

입사해 돈을 벌면서부터 나는 내 욕망을 통제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던 취미를 종이에 죽 써놓고 에라 모르겠다하고 저질러 갔다. 돈이 생기는 대로 음반을 사모았으며 오디오가게의 ‘호갱님’이 되어가며 오디오를 업그레이드했다. 그리고 틈만 나면 여행을 갔다. 다녀온 나라가 80개국을 통과했으니 결코 적지 않다.

▲ ⓒpixabay

돈이 뭉텅이로 들어가니 취미외에는 욕망을 통제했다. 차비를 아껴 걸어다녔고, 짜장면 대신 라면을 끓여 먹었다. 그 결과 30년 이상이 된 사진취미와, 오디오평론에 음반평론도 하게 됐으며 국제 오페라축제의 심사위원 노릇도 하게 됐다. 거친 운동을 좋아해 복싱도 1년 배웠고, 스쿠버다이빙은 10여 년이 됐다. 얌전한 놀음도 좋아해 일찍이 피렌체에서 배운 커피에 심취했다. 10여 년간 에스프레소와 카푸치노를 만들어마셨고, 생두를 사다가 이웃 눈치를 보며 콩을 볶았다. 유럽바리스타 자격(SCAE)도 따두었다.

나에게 맞는 취미에는 다들 10년 이상의 세월을 조공으로 바쳤다. 그러다보니 저절로 인생이 즐거워졌다. 버린 것은 돈과 시간이었지만 세상 그 어떤 보석보다도 값진 행복을 얻었다. 내가 가진 호사스런 취미외에는 철저하게 가난하다. 값나가는 오디오와 음반들, 커피기기들과 스쿠버 장비들은 그러므로 내 가난한 욕망의 저장고이다.

그렇게 잘 놀다 보면 은행대출은 언제 갚느냐고? 나는 웃으며 말할 수 있다.

“그건 제가 잘 알아서 할게요^^”

천상병시인의 싯귀처럼 이 세상 소풍이 끝나는 날, 나는 웃으며 세상을 떠날 것이고 가족이 남은 재산을 정리해 대출금을 갚을 것인데 무엇이 그리 걱정인지 모르겠다.

▲ 남우선 PD의 책 '남자의 취미' '여자의 취미'

2년전 나는 취미에 인생을 바친 9명의 이야기를 취재해 ‘남자의 취미’란 책을 펴냈다. 할리 데이비슨에 빠진 영화배우 최민수, 오디오에 빠진 시인 김갑수 등이 그 주인공이었다.

8월 초에는 취미가 인생을 구제한 9명의 여성을 다룬 ‘여자의 취미’를 발간했다. 책에 실린 오타쿠들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들을 인터뷰하면서 나의 가슴은 같이 뛰었고 같이 슬펐고 같이 행복했다.

여러 가지 힘든 여건과 역할의 장벽을 딛고, 자신이 실로 사랑하는 취미를 실현함으로써 행복을 얻었다는 점에서 내가 만난 그들은 진정 이 시대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사표(師表)가 될 만하다. 삶을 대하는 주인정신과 과단성, 그리고 취미를 추구하며 인생이 아름다워진 스토리는 때로는 웃음으로, 때로는 가슴 절절한 아픔으로 우리 모두의 공감을 자아낸다.

진정 하고 싶은 일이 있는가? 욕망은 그것을 하기 전까지 가벼워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슴의 체온이 식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이미 후회해도 때는 늦을 것이다.

욕망이 없는 가슴이 오히려 더 문제다. 아무 것도 하고 싶은 게 없다는 사람은 구석에 가서 욕망하나 없는 가슴을 한탄하며 짐짓 슬피 울어야 한다.

세상 사람 모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리오마는 필자가 만난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을 인터뷰할 때나 지금에나 취미에 관한한 ‘동료환자’로서 동질감을 느끼게 한다. 그들의 삶은 나를 들여다보게 하는 거울이자 나를 가르치는 스승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자기에게 가치있는 인생을 선물하고 싶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바치는 감동적인 헌사(獻詞)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 매뉴얼이다.

▲ ⓒpixabay

취미에 몰입한 사람들이 조직생활에서 보이는 열정과 추진력은 그들이 취미에 바치는 열정의 크기에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만난 모든 오타쿠들은 다른 이들보다 독보적이었고 무엇인가를 이루어 내는데 탁월한 추진력을 가지고 있었다. 완성할 때까지 물고 놓질 않았다.그러므로 취미가 가지는 긍정적 기능은 말할 나위없이 그들의 삶에서 확인할 수 있다.개인의 취미에 바치는 그들의 조급증과 결벽은 자신이 하는 일에 있어선 타인과의 경쟁에서 긍정적인 결과로 나타나는 일이 많음을 볼 수 있었다.

▲ 남우선 대구 MBC PD

* 필자는 대구MBC PD로 책도 쓰면서 음반과 오디오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취미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 책' 남자의 취미'에 이어 얼마 전에는 책 '여자의 취미'를 출간했다. 플로리다 주립대(F.S.U)매스커뮤니케이션학과 연구교수를 지냈으며 다큐멘터리 <대한민국 독도>로 국제상 2관왕을 거머쥐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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