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산골에서 일제 수탈의 길을 다시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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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현제의 산골PD 스토리]

광복 70주년 인플레이션이다. 온통 광복 70주년이었다. 방송사마다 ‘광복 70주년’이란 접두어를 모든 행사와 특집방송에 앞세웠다. 이름표만 붙인다고 알맹이가 달라지지 않듯 광복 70주년으로 껍데기만 포장한다고 그 속살이 달라지진 않는다. 오히려 무분별한 공급 과잉은 본래의 가치마저 떨어뜨리는 법이다.

창고 대방출처럼 앞다투어 쏟아내는 ‘광복70주년’ 특집방송 홍수 속에서 서울 방송이 아닌 강원도 산골방송국에서 광복을 다룰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아인슈타인

모든 시작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이번 특집도 여느 때처럼 질문이 모티브가 됐다. 변방의 산골방송국에 허락된 제작여건으로는 너무 크고 버거운 아이템일까? 지역이라고 지역에 국한된 아이템만 다루어야 한다는 막연한 선입관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 중앙과 지역에 공통으로 영향을 미치는 아이템들을 발굴하여 지역의 시각으로 지역의 사례를 다룰 순 없는 걸까? 오히려 지역의 관점에서 전국적인 이슈에 접근하고 분석하다 보면 진정한 로컬리티를 구현해낼 수 있진 않을까? 광복절, 일제 식민수탈, 강제동원 등 굵직한 아이템은 왜 꼭 서울 메이저 방송사에서만 다루어야 하나? 전국적인 이슈는 로컬리티에 담아낼 수 없는 것인가? 강원 산골, 해안 지역에도 분명 일제 식민수탈의 역사는 있었을 텐데 다른 지역과는 좀 다른 스토리가 있지 않을까?

나를 바꾸면 세상이 보이듯 질문을 바꾸면 답이 보인다. 내 안에 수없이 오가는 질문 속에서 조금씩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정반대의 질문들도 나를 흔들었다. 틀과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이런 과감한 아이템 선정이 무모함으로 비치진 않을까? 열악한 지역제작여건에 부대끼다 제풀에 나가떨어지지나 않을까? 늘 하던 대로 하지 않고 바늘로 소 잡는 괜한 과욕을 부리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서울방송들의 광복절 특수 물량공세 속에 흔적도 없이 파묻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 MBC강원영동 <뉴스토크 말쌈> ⓒMBC

“성공은 못 하더라도 성장을 포기하진 말자.”

강제동원 희생자 실태조사, 피해생존자 취재 인터뷰 확보, 산간·해안지역 자원수탈지역 고증, 현장취재, 전문가 패널 섭외, CG 음악 후반 작업 등 한 달로도 빠듯할 일에 허락된 제작 기간은 단 2주! 1시간 특집물로는 초라한 1백만 원 안팎의 제작예산!! 게다가 데일리 뉴스에 쫓기는 기자 1명, 시사프로그램 근처도 가보지 못한 딴따라 PD 1명에 방송경력 2개월 차 신입 작가!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야말로 체력으로 때우는 ‘맨땅에 헤딩’ 정신(?!)만이 제작진에게 장착된 유일한 무기였다.

이런 모든 걸 담을 프로그램의 장르는 흔히 떠올리는 다큐가 아니라 내가 지금 담당하고 있는 보도국 프로그램이었다. PD와 기자가 함께 만드는 것이라지만 누가 봐도 주도권은 보도국이 갖고 있는 거다. 그래서 이제까지 PD는 아이템 선정에 관여하지 않고 취재기자와 보도데스크가 주도적으로 아이템을 선정해왔고, PD는 뉴스 따라잡기 정도의 포장제작을 담당해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PD가 직접 기획을 하고, 그것도 로컬리티가 희박한 광복 70주년 ‘일제 강제동원’ 아이템을 들고나오니 내 파트너인 담당 취재기자는 걱정이 앞섰을 것이다.

“현제 형, 이거 70년 전 강원도 피해사례를 찾아내어 희생자 유족, 피해자들을 제대로 취재하지 못하면 로컬리티 없다고 욕먹을 것 같은데..”

하루하루 데일리 뉴스를 생산해내야 하는 취재기자가 1시간 분량의 특집 프로그램 취재를 덤으로 떠안는 것은 무거운 숙제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성공은 못 하더라도 성장을 포기하진 말자는 말로 의기투합하기로 했다.

뭐 하나 확실할 것 없는 상태에서 ‘섭외는 PD, 취재는 기자’라는 역할분담을 정해놓고 D-14 카운터 다운은 시작됐다. 강원 남부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자행됐던 일제 강제 동원 수탈의 길을 되짚어보면서 광복 70주년, 앞으로의 길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살펴보기로 했다. 조선인 강제노동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식민 수탈의 역사를 자신들의 근대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록한 일본 제국주의의 이중성을 ‘다크 투어리즘’으로 되짚어 보기로 했다.

MBC강원영동 광복 70주년 특집 방송 <뉴스토크 말쌈> 프로그램은 그렇게 시작됐다. 기자의 취재와 PD의 큐레이션을 프로그램에 녹여내는 콜라보 도전이었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산과 계곡이 서로를 탐하며 빼어난 풍광을 뽐내는 강원도 삼척시 가곡면 덕풍계곡. 수려한 절경으로 강원도 산골방송국엔 그야말로 아이템 보고다. 1박2일, 산골음악회, 온갖 매거진 프로그램 단골 촬영지로도 익숙했던 곳이다. 그런데 일제 자원수탈을 증언해주신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계곡과 산길을 따라 70년 세월을 거슬러 산을 오르면서 수탈이 할퀴고 간 상처를 고스란히 만나게 되자 빽빽한 숲과 맑은 계곡 물이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일제 강제동원과 식민수탈 피해를 눈과 귀로 직접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대일항쟁기 시절, 이 아름다운 산과 계곡을 가진 강원도 해안지역은 석탄과 산림이 풍부하고 일본과 가까운 동해안에 위치했다는 이유로 자원수탈과 노역수탈이 극심하게 겪어야 했다. 태평양전쟁 막바지 군수물자를 빼내 가기 위한 일제 강점기 자원 수탈의 길은 첩첩산중 골짜기까지 이어졌다. 산에서 캔 철광석을 망태에 가득 담고,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맨몸으로도 오르기 힘든 이 거친 산길을 올랐을 것이다.

▲ MBC강원영동 <뉴스토크 말쌈> ⓒMBC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잊어버리면 용서를 할 수 없다. 잊어버리면 용서해야 할 아픔을 또 만들 수 있다. 망각은 과거의 상처를 완전히 지울 수 없다. 상처받은 개인도, 민족도, 진정한 치유는 과거의 아픔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데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슬픈 과거는 제대로 슬퍼해야 치유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픈 과거도 나의 일부분이듯 아픈 역사도 우리 것이다.

과거를 잊은 개인에겐 미래가 없고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에겐 비전이 없다. 그래서 역사학자 E.H 카는 역사를 단순한 과거로 보지 않았다.

“역사는 과거와 현대와의 끊임없는 대화이다”-역사학자 E.H 카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지식으로 알기 위해 역사를 살피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앞에 놓인 이 현실 속에서 지금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고, 미래에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보다 합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과거의 경험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아픈 역사도 우리의 것이고, 과거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광복 70주년을 맞이해 함께 느끼고 싶었다.

사람의 행동은 지식만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마음에 감동이 있어야 행동이 나온다. 교실에 앉아서만 공부하면 아무리 감동적인 것도 지식이 되기 쉽고,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만지고 발로 밟으면서 현장에서 공부하게 되면 마음속에 감동이 오기가 쉽다. 역사 공부를 하는 건 역사적 지식만을 축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적 지혜를 통찰해 우리의 삶의 방향을 제대로 세우기 위해서다. 방향을 잡았다면 행동을 해야 삶이 바뀐다.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아인슈타인

매일 똑같은 삶을 살고 있으면서 다른 삶을 기대하는 것. 내게 편하고 익숙한 것은 아무것도 놓아버리기 싫은데 지금과 다른 무엇을 꿈꾼다면 욕심이란 얘기다. 일상적인 반복의 늪에서 벗어나 낯선 소통을 하게 되면 삶의 리듬이 살아나는 것 같다.

낯선 곳에서 보내는 시간은 순간순간이 깨달음의 연속인 것 같다. 편성제작에서만 20년 세월을 보낸 ‘딴따라 PD’에게 보도시사 프로그램은 여전히 낯설고 불편했지만 광복 70주년 <뉴스토크 말쌈>은 그 낯섦과 불편함이 나의 한계를 일깨워 한 뼘 더 성장케 하는 기회였음을 알게 되었다.

▲ 하현제 MBC강원영동 PD

끝으로 무모한 도전에 심취해 황당한 기획만 일삼는 얼치기 산골PD의 허점을 꼼꼼한 취재로 메워주고 설거지도 마다하지 않은 조규한 기자에게 “너 아님 큰일 날 뻔했다. 정말 고마웠고, 다음에 또 사고치자”라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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