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EBS를 지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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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EBS에 뉴라이트 출신 사장이 유력하다는 기사를 보니 생각이 복잡해졌다. 잘못된 사장 선임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이지만, 동시에 그렇게 이슈화가 된 이후에 EBS 구성원들이 감내해야 할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 사실상 내가 아무것도 책임져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2년여 전에 퇴사를 하고 지금은 전혀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사람들과 지내는 입장에서 원론적인 문제제기를 넘어서 무언가를 이야기한다는 게 조심스러웠다.

국민TV에서 인터뷰 제의를 받았을 때도, 이 글을 <PD저널>로부터 의뢰를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내게 그러한 요청을 한 이유가 EBS 출신이기 때문이라는 걸 잘 알기에 더욱 그랬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질문에 답을 할 순 있지만, 그 답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확신이 없다. 백지 위에 글을 써내려 가는 일은 더욱 힘들다.

▲ EBS 노조 조합원들이 지난 1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이념편향 사장을 반대하는 피켓 시위 중이다. ⓒEBS노조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것도 내 팔자라고 생각해버리기로 했다. 다만 타 방송사 이야기를 하듯 객관적이긴 분명히 어렵다. 그래서 그냥 잠깐 눈을 감고 10년을 일했던 EBS를 떠올려봤다. 그리고 그 때 EBS 구성원들의 공영방송을 위한 노력을 기억해 봤다.

내가 EBS에서 일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가 ‘교육’이란 두 글자에 대해 구성원들이 갖는 고민의 정도가 외부에서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다는 것이었다. 적지 않은 이들이 교육방송이라고 하면 수능방송과 같은 입시를 떠올리지만 구성원들은 그렇게 쉽게 생각하지 않았다. 딱히 ‘교육’에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영상을 만들고 싶어서 입사한 내 입장에서 볼 땐 그들은 단순히 방송사의 직원이 아니라 교육전문가에 준하는 이들이었다.

당연히 전반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다. 여기서 ‘보수’라고 하는 건 우리나라 정치지형 속에서 왜곡된, 그러니까 ‘수구세력’이 스스로를 보수라고 우기는 그런 게 아니라 사전적 의미의 보수를 말한다. 확실하게 검증되고 보편적으로 통용되어지는 범주 안에서 프로그램 내용을 만드는 것을 선호했다. 원래 ‘교육’이라고 하는 게 그처럼 보편적 합의를 거쳐낸 것들을 후세대에게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채널e>를 만들 때 그래서 내부에서 많은 충고를 듣기도 했다. 자유로운 창의성은 최대한 발휘하더라도 EBS가 ‘교육’ 방송으로서 지녀야 할 중립적 가치에 대해 보다 깊게 고민하라는 충고였다. 처음엔 때론 좀 너무 소극적인 태도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기계적 중립에 갇히는 문제가 있진 않은가 고민도 했지만 프로그램이 사람들의 정치적 성향, 이념적 성향과 상관없이 보편성 안에서 인기를 얻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그게 ‘교육’ 방송이자 ‘공영’ 방송으로서 지녀야 할 표준적인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됐다.

▲ EBS 노조 조합원들이 지난 1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이념편향 사장을 반대하는 피켓 시위 중이다. ⓒEBS노조

생각해 보면 전문적인 보도를 하지 않는 EBS는 어쩌면 그러한 ‘공영방송’의 가치를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조건에 있기도 하다. 매일 매일 시의적 이슈, 특히 정치사회적 이슈를 쫓아야 하는 타 방송사와 달리 한 호흡 여유를 가지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합의한 범주를 차근차근 쫓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게 EBS 구성원들 입장에선 타 방송사만큼의 영향력을 갖지 못하는 약점이기도 하지만, 시청자들 입장에선 전쟁처럼 난리통인 세상에서 보편성 안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공영 방송이 하나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 아닐까?

그런 방송사에 여전히 나라를 분열로 몰아가고 있는 ‘국정 교과서’의 핵심 인물 중 한명이 사장으로 내정되었다고 한다. 그 어느 방송사보다 ‘보편성’에 기반하여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는 방송사에 그 어느 이슈보다 가장 ‘극단적인 이슈’를 세상에 던져 충돌을 야기하는 분이 온다고 하니 마치 물과 기름을 섞어 보겠다는 황당한 이야기로 내겐 느껴진다.

선거 때마다 의견이 달라 논쟁을 하는 부모님도 EBS의 많은 프로그램들을 즐겨 보신다. 내가 퇴사를 한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당연히 내 프로그램만 보시는 게 아니며, 오히려 섭섭할 정도로 다른 프로그램들을 즐겨 보신다. 그리고 나 역시도 부모님이 즐겨보시는 EBS의 프로그램을 퇴사 후에도 즐겨 본다. 어릴 땐 몰랐는데 나이가 들수록, 부모님과 내가 함께 TV 앞에 앉아 미소 지으며 볼 수 있는 EBS가 참 소중한 방송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소중함을 이 정권이 지켜줄 생각이 있다고, 아니 그런 소중함에 대해 이해하고 있을거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또 상식적인 문제제기를 하면 곧바로 해직으로 답변하는 현 정권하 언론현실에서 EBS 구성원들의 결기만을 강조하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다. 다만 그런 ‘소중함’에 대해 적어도 시청자분들만큼은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다.

 

현재 EBS 구성원들은 그런 소중함을 지키기 위해 분명 애쓰고 있을 것이다. 부디 그들에게 작은 응원의 말이라도 보내주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시청자 분들이 보내주시는 그런 응원들이, 그런 마음들이 ‘EBS 구성원들의’ EBS가 아니라 ‘시청자들의 EBS’를 지켜줄 거라고 생각한다. 소중한 방송사 EBS를 지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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