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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은 PD의 뽕짝이 내게로 온 날]

ⓒpixabay

P선배가 다리를 다쳤다고 한다. 아니 발가락을 다쳤다고 한다. 더 정확하게는 엄지발가락 골절상을 입어서 깁스를 했다고 한다. 엄지발가락을 다친 것이나 다리를 다친 것이나 치료 과정을 비슷하다. 한마디로 집에서 ‘꼼짝 마’ 상태로 자체 구금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평소 침착하고 찬찬한 성격의 소유자인지라 어쩌다 그런 해를 입게 되었는지 관심이 모아졌는데 사연은 이러했다. 평소 효심이 지극한 P선배는 허리 수술을 한 친정어머니를 집으로 모셔서 달포 남짓 간호를 했다고 한다. 각오한 일이지만 어머니를 간호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어서 바깥 생활도 일절 접고 오로지 집에서 간병에 매달려야 했다. 다행히 어머니는 건강을 회복해서 오빠 집으로 가시고 비로소 작은 자유를 만끽하며 미루던 대 청소를 시작했는데 돌돌 말아놓은 카펫에 걸려 넘어지고 만 것이다. 그 바람에 온 몸에 타박상을 입고 급기야 엄지발가락 골절이라는 상해를 입게 되었다. 어머니 병간호에서 벗어나 한숨 돌리려는 찰나, 또다시 본인의 치료를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며 P선배는 ‘참으로 인생은 알 수 없다’고 허탈하게 웃었다.

언제쯤 사랑을 다 알까요 언제쯤 세상을 다 알까요
얼마나 살아봐야 알까요 정말 그런 날이 올까요
시간을 되돌릴 순 없나요 조금만 늦춰줄 순 없나요
눈부신 그 시절 나의 지난 날이 그리워요
오늘도 그저 그런 날이네요 하루가 왜 이리도 빠르죠
나 가끔은 거울 속에 비친 내가 무척 어색하죠
정말 몰라보게 변했네요
한때는 달콤한 꿈을 꿨죠 가슴도 설레였죠
괜시리 하얀 밤을 지새곤 했죠
언제쯤 사랑을 다 알까요 언제쯤 세상을 다 알까요
얼마나 살아봐야 알까요 정말 그런 날이 올까요

- 이문세 노래 <알 수 없는 인생> 가사 일부

P선배의 ‘자택 구금’은 그날부터 시작됐다. 엄지발가락은 부위는 작지만 온 몸을 지탱하고 있어서 조금만 움직여도 회복이 늦어지는 지라 걸을 수도, 서 있을 수도 없는 ‘신체 구금’ 도 감수해야 했다. 가뜩이나 부지런하고 깔끔한 성격의 P선배는 집안일은 일절 생략하고 외부 나들이도 삼가야 했다. 가끔씩 점심을 사들고 집에 오는 후배들과의 만남이 유일한 낙이었다고. 그렇게 근신하면서 ‘두 발로 걸어서 다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알게 되었고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깁스를 풀던 날 “이제 비로소 가을을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며 “프리덤”을 외치던 P선배의 환한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인체는 참으로 신비롭고 경이로워서 사소한 어느 부위도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 3~4년 전쯤, 나 역시 작은(?) 부상을 당한 적이 있다. 자동차 문에 손가락이 끼어서 오른손 장지 손가락에 금이 가는 바람에 몇 주인지 몇 달인지 깁스를 하고 다녔는데, 이게 보통 불편한 게 아니었다. 우선 세수를 제대로 할 수 없고, 젓가락질도 불편하다. 운전하는데도 방해가 되고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도 자유롭지 못하다. 편집할 때도 시간이 두 배 넘게 걸린다. 그렇게 고생을 하고 깁스를 풀고 보니 그야말로 세상이 달리 보였다.

심한 감기를 앓고 있던 후배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더니 후배가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요, 집에서 코털 깎는 기계를 샀거든요. 재밌어서 코털을 심하게 밀었더니 그만…….” 시트콤 같은 상황 설명에 유쾌하게 웃었지만 코털이 외부로부터 불순물을 막아주는 것은 물론 온도 조절 기능도 담당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 몸에서 털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

헬렌 켈러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란 글이 떠오른다. 시력과 청력을 잃고도 인간과 자연, 세상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실천한 위대한 사람, 헬렌 켈러는 사흘만 볼 수 있다면 첫째 날은 친절과 겸손과 우정으로 삶을 가치 있게 해준 사람을 보고 싶다고 했다. 제일 먼저, 어린 시절 그녀에게 다가와 바깥세상을 활짝 열어 보여주신 사랑하는 앤 설리번 메이시 선생님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싶다고 했다.

둘째 날은 새벽같이 일어나 밤이 낮으로 바뀌는 그 전율 어린 기적을 바라보고 싶다고 했다. 태양이 잠든 대지를 깨우는 경건한 빛의 장관은 얼마나 경이로울까 감탄하면서 자연의 역사를 공부하고, 마지막 날에는 현실 세계에서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구경하며 보내고 싶다고 했다. 큰길에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보고 아침에는 오페라 하우스, 오후에는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고 싶다고 했다. 저녁이 되면 건물의 숲을 이루고 있는 도시 한복판으로 걸어 나가 네온싸인이 반짝이는 쇼윈도에 진열된 아름다운 물건들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와 눈을 감아야 할 마지막 순간, 사흘 동안이나마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영원한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겠노라고.

▲ '행복한 사람'이 수록된 가수 조동진 앨범

울고 있나요 당신은 울고 있나요
아-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
아직도 남은 별 찾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두 눈이 있으니
외로운 가요 당신은 외로운 가요
아-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
아직도 바람 결 느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그 마음 있으니

- 조동진 노래 / <행복한 사람> 가사)

매일 보고 매일 들을 수 있는 나는 헬렌 켈러의 글을 보면서 한없이 낮아진다. 엄지발가락이 부러지지 않아도, 손가락에 깁스를 하지 않아도, 감기에 걸리지 않아도 삶을 찬양하고 경이로운 세상에 감사를 잊지 않아야 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린아이가 뜨거운 것에 놀라 봐야 뜨거운 것의 위험성을 알 듯 겪어보고 난 후에야 그 전의 가치를 알게 된다. 그러나 나에게 닥친 사소한 불행이나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일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주는 선물임을 잊지 않는다면 분명 그만큼 더 진리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아픔도 선물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인생을 조금은 아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 필자는 대학졸업 후 신문기자를 거쳐 라디오 PD로 일하고 있다. PD로서 지역의 문화와 지역 발전을 위한 다수의 프로그램을 제작해서 이달의 PD상, 방송문화진흥회 공익프로그램 상 등을 수상했고, 수필가로서 전북여류문학회장 등의 활동을 펼쳤다. 저서로 『뽕짝이 내게로 온 날』, 『그리운 것은 멀리 있지 않다』가 있다. 전북수필문학상, 전북여류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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