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에 역사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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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에 역사가 흐른다
[제작기] MBC경남 다큐멘터리 ‘낡은 집’
  • 김현지 MBC경남 PD
  • 승인 2016.01.05 14: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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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획 없이 발길 따라 만들어진 골목은 이쪽인가 싶으면 저쪽이고 막혔나 싶으면 희한하게 새 길로 이어진다. 사진은 MBC경남 다큐멘터리 '낡은 집' ⓒMBC경남

구도심의 골목길을 걸으면 길을 잃기 쉽다. 구획 없이 발길 따라 만들어진 골목은 이쪽인가 싶으면 저쪽이고 막혔나 싶으면 희한하게 새 길로 이어진다. 이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과정도 그랬다. 분명 ‘근대문화유산 보존’이라는 역사・문화 아이템에서 시작했는데 오래된 건물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들추다 보니 거기 살았던 혹은 살고 있는 거주자들의 인생이라는 전혀 다른 장르로 이어졌다. 이야기의 변주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낡은 집과 주민을 위협하는 재개발과 철거 문제는 도시를 움직이는 자본을 분석하게 했고 결국 도시를 어떤 눈으로 바라볼 것인가라는 거대 담론으로 맺어졌다.

연출은 분명 길을 잃고 또 잃었다. 휘청대는 나에게 갈 길을 알려준 건 한 세기를 말없이 버텨준 낡은 집들이었다. 구십 평생 세 번이나 집을 빼앗겨도 견뎌낸 낡은 동네의 주민들이었다.

낡은 집은 100년의 유산

2014년 한 해 동안 ‘100년의 유산’이라는 근대문화유산 코너를 제작한 적이 있다. 100년 전 지어진 돌성당부터 일제강점기 지어진 상가주택까지 온갖 오래되고 낡은 건물을 돌아보았다. 도시의 역사는 번화가가 아니라 재개발구역 너머 낡은 집에 더 많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 그동안 흉물스럽다 여겼던 낡은 집이 고가의 엔티크 가구처럼 아름답게 여겨졌다. 수년 째 빈집으로 방치된 적산가옥을 보며 ‘내가 돈만 좀 있었어도 저걸 사서 고풍스러운 파스타집으로 꾸며볼텐데’ 침을 흘렸다.

하지만 깨달음은 늦었고 철거는 빨랐다. 매일매일 이름도 붙이지 못한 많은 건물들이 사라졌고 창원시에서는 보존가치와 경제성을 저울질하느라 아무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개인의 공간이면서 역사의 증거이기도 한 낡은 집들이 헐리고 무색무취한 아파트나 원룸촌이 들어선다는 게, 도시의 문화가 이토록 손쉽게 철거될 수 있다는 게 화가 났다. 하지만 근대문화유산이 소중하다고 말하는 다큐멘터리는 이미 차고 넘치는데 내가 해야 할 이야기가 남아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던 중 그 불이 났다.

▲ ‘지하련 주택’은 1930년대 지어져 일식과 서양식이 뒤섞인 소위 문화주택이지만 갑작스런 불로 일부가 탔지만 재개발구역에 묶여 보수공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사진은 MBC경남 다큐멘터리 '낡은 집' ⓒMBC경남

2015년 6월 24일 창원 마산야구장. 기아와 NC의 경기 중 갑자기 검은 연기가 야구장을 가득 매웠다. 뒤편 용마산에서 넘어온 연기는 10분간 경기를 중단시켰고 이 사실은 그날 저녁뉴스에도 보도되었다. ‘모깃불로 2층 목조주택 화재.’ ‘외부 화재로 야구경기가 중단된 것은 처음.’ ‘모깃불의 발화온도는 과연 몇 도?’

그래서 이 다큐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 뉴스는 그래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야구경기 중단이나 모깃불의 온도도 물론 중요하지만 불타버린 그 집에는 ‘500만원의 재산피해’라는 한 문장으로 줄여버리면 안될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섭외의 어려움으로 촬영을 미루고 있던 그 집은 일명 ‘지하련 주택’으로 1930년대 지어져 일식과 서양식이 뒤섞인 소위 문화주택이다. 대한민국 페미니즘 문학의 효시라고도 할 수 있는 소설가 지하련이 머물렀고 당대의 천재문인이자 혁명가였던 임화와 사랑에 빠진 곳도 바로 그 집이다. 보존 가치가 충분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재개발구역에 속해있다는 이유로 불탄 자리를 제대로 보수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 믿을 수 없었다. 재개발 시공사에서 발표한 설계도에 따르면 지하련 주택을 허문 자리에는 놀이터 옆 화단이 세워질 예정이다.

재개발이라는 괴물과 싸우는 낡은 집

▲ MBC경남 다큐멘터리 '낡은 집' 취재 과정에서 보물처럼 발견한 일한와사 사택(창원시 마산합포구 반월동 위치. 1930년대 지어진 일제강점기 마산 최초의 전기회사 사장 관사) ⓒMBC경남

취재 과정에서 보물처럼 발견한 일한와사 사택(창원시 마산합포구 반월동 위치. 1930년대 지어진 일제강점기 마산 최초의 전기회사 사장 관사) 역시 재개발구역에 묶여 언제 헐릴지 알 수 없었다. 주인은 집을 두고 떠난지 10년이 넘었고 사람 대신 나무와 모기가 어두운 집을 지키고 있었다. 80년의 세월이 박제된 듯 남아있는 집은 그림만으로도 흥미로웠고 이야기는 거기서 그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촬영을 하다 보면 내가 이야기를 찾는 것인지 이야기가 날 부르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이 집이 그랬다.

주민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재개발이라는 괴물과 10년 째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했다. 허름한 집이라도, 오래된 집이라도 내 집인데 어째서 내줘야 하는지 피를 토하듯 물었다. 집을 찍으러 가서는 하루 종일 도시정비법에 대한 강의를 들었고 온갖 법정다툼과 힘없는 주민들을 향한 끔찍한 테러 이야기도 들었다. 근대문화유산 이야기하다가 난데없이 무슨 재개발 이야기냐고 질색하는 동료들을 설득했다.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시 생태계의 맨 아래에 놓인 낡은 집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포식자가 되어 고급 아파트에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누군가는 이끼처럼 낮고 낡은 집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랄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살아야 집이 살고 동네와 역사도 살아남는다.

가나자와 공무원을 벤치마킹하라

▲ 일본 가나자와의 사례를 취재하는 동안 그들이 무척 부러웠다. 유명 문화재급 건물뿐 아니라 일반 주택 개보수에도 시 지원금이 나오는 것도, 오래된 공장을 철거하는 대신 주민 문화공간으로 개조한 것도 부러웠지만 가장 부러운 것은 공무원들의 태도였다. 사진은 MBC경남 다큐멘터리 '낡은 집' ⓒMBC경남

일본 가나자와의 사례를 취재하는 동안 그들이 무척 부러웠다. 유명 문화재급 건물뿐 아니라 일반 주택 개보수에도 시 지원금이 나오는 것도, 오래된 공장을 철거하는 대신 주민 문화공간으로 개조한 것도 부러웠지만 가장 부러운 것은 공무원들의 태도였다. 낡은 집 하나하나의 역사와 주민들 이름까지 모르는 게 없었고 보조금을 주면서도 거만한 기색이 없었다. 도시재생사업의 주체는 시민이라는 의식이 확고했다. 단기간의 성과에 급급하지 않고 장기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한 부서에 오래 근무하며 전문성과 주민 신뢰를 쌓아나간 결과였다. “제가 이 부서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라는 옹색한 변명을 자주 듣게 되는 대한민국 공무원 사회와는 사뭇 달랐다. 우리도 공무원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전문가가 될 수 있다면 문화유산 관리를 개인들에게 떠넘기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여행자 X와 남은 이야기

제목은 그저 ‘낡은 집’인데 이야기는 곁가지가 너무 많았다. 집은 사는 곳이기도 했고 사는 사람 그 자체이기도 했고 동네이기도, 역사이기도, 돈이기도 했다. 부유하는 이야기를 줄 세우기 위해 ‘여행자 X’가 필요했다. 근대문화유산을 관광상품으로만 여기는 사람들에게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서다. 그런데 다큐 촬영 내내 함께할 출연자를 찾는 건 제작비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게 어딜 봐도 허술한 아줌마 PD가 ‘여행자 X’로 나선 이유다. 스스로 편집권을 가졌기에 그나마 용기를 낼 수 있었음을 고백한다.

촬영을 하며 가장 두근거렸을 때는 어두운 밤, 빈 집에 불을 켜러 들어갔을 때다. ‘낡은 집에 불이 켜진다면’이라는 상상을 화면으로 만들고 싶어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빈 집에 조명과 배터리를 잔뜩 이고 갔다. 그림은 아주 마음에 들게 나왔지만 우리 때문에 밤새 짖어댄 동네 개들에게 미안했다. 대신 이리떼같은 빈 집의 모기들에게 꾸준히 피를 제공한 것으로 빚을 갚고자 한다.

인터뷰를 위해 통의도시연구소를 찾았을 때 처음 뵙는데다 다소 어려운 분위기의 최종현 소장님께서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셨을 때를 잊지 못한다. 2년 동안 취재한 나도 이렇게 분통 터지는데 평생을 바쳐 연구한 칠순 노학자의 마음을 짐작조차 하지 못하겠다. 귀한 꾸지람 들려주신 소장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소장님 말씀대로 우리 도시의 나이테를 지킬 수 있길 바란다.

▲ 주민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재개발이라는 괴물과 10년 째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했다. 사진은 MBC경남 다큐멘터리 '낡은 집' ⓒMBC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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