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잔이거나, 빈 의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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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은 PD의 뽕짝이 내게로 온 날]

나잇값을 못하는 지 아직도 내 나이가 낯설다. 50이라는 숫자에 익숙지도 않은데 쉰한 살 생일 무렵, 덜컥 암이라는 병이 드러났다. 언젠가부터 내 몸속에서 자라고 있었을 터, 가슴 윗부분에 단단하게 뭉쳐 있는 그것을 이르게 발견한 것이 큰 다행이라고 했다. 암 진단을 받은 후부터 내게 큰 변화가 생겼다. ‘김사은’이라는 사람 중심에서 ‘암에 걸린 김사은’으로 삶의 중심이 이동되었고 모든 것은 암에 걸리기 전과 암에 걸린 후로 확연하게 구분되어졌다.

그렇다. 같은 사람인데도 암에 걸리기 전과 암에 걸린 후, 그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그의 언행이 나의 절박함에 비례된다고나 할까. 늘 가까이에서 사소한 일상을 나누었을 뿐인데 암에 걸린 후 그들은 내게 둘도 없는 소중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위로와 사랑과 격려와 용기를 주는 데 있어서 순위를 매길 수는 없지만 그들을 기억하고 그 표현과 방법을 통해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하기에 기록으로 남기고 하나씩 실천하자는 것이 인생의 새로운 목표가 되었다. 내 삶을 은혜로 빛내준 고마운 사람들, 그 사람들이 있어 지난 일 년이 행복했고 다가올 미래가 두렵지 않다.

▲ '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가 수록된 조하문 2집

어둠을 헤치는 세월은 말없이 흘러만 가는데
지나간 시간이 서러워 한없는 눈물만 흐르네
그러던 어느 날 사랑을 만났네 누구도 느낄 수 없는
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 내 모든 사랑 드려요
이 눈물 보시는 당신에게 내 마음 드려요
어느덧 구름은 걷히고 따스한 햇살이 내게로
젖었던 내 마음 마르고 파아란 하늘이 감싸오네
이제는 나는 사랑을 배웠네 누구도 느낄 수 없는
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 내 모든 사랑 드려요
이 눈물 보시는 당신에게 내 마음 드려요

(조하문 노래 / <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 가사 일부)

제일 먼저 회사 동료들이 떠오른다. 암 진단 이후 수술과 건강에 집중하라며 곧바로 일을 나눠가진 동료들은, 휴직을 연장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한결같이 응원해 주었다. 언젠가 회사에 잠깐 들렀을 때, 수개월간 비운 자리에 먼지가 쌓이지 않고 오히려 깨끗하고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어서 깜짝 놀랐다. 일에 대한 부담을 잊고 투병에 전념할 수 있게 지지해 준 동료들이 정말 고맙다. 언제든 돌아갈 내 자리가 있고 반겨줄 동료들이 있다는 것은 큰 힘이 된다.

항암과 투병 기간 중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은 언론사에서 퇴직한 김진형 선배다. 비슷한 아픔을 겪은 김 선배는 내가 놀라거나 걱정할 틈도 주지 않고 바로 그 분야 권위자를 연결해서 수술 절차를 밟았다. 수술에 앞서 매번 나와 함께 서울을 오르내리며 각종 검사과정을 진두지휘(?)해서 불안하거나 두려운 마음을 많이 내려놓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바쁜 남편을 대신해서 여덟 번의 항암 기간 중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 병원에 동행해 주셨다. 1박 2일의 병원 일정은 물론 치료를 위한 머나먼 여정에도 기꺼이 함께 해주셨는데 그 시간 투자는 물론 선배가 감당한 경비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새벽차에 몸을 실을 때나 밤늦게 도착할 때마다 반드시 형부가 마중을 나와서 민망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으니 김 선배와 형부가 함께 병간호를 해주신 셈이다. 그토록 정성스러운 김 선배에 대해, 남편과 친정어머니는 ‘가족도 하기 힘든 노릇’이라고 무척 고마워하셨다.

병원 입원기간 중 남편이 자리를 비워야 하는 시간에 후배 진아가 휴가를 내고 병간호를 자원했다. 직장인에게 천금같이 귀한 휴가를 낸 후배를 보면서 큰 감명을 받았다. 더욱이 어찌나 살뜰하게 간병을 하던지 함께 있는 시간이 편하고 즐거웠다. 커튼이 드리워진 병실에서 우리는 어느 때 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더 많이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 ⓒpixabay

천 번이고 다시 태어난 데도 그런 사람 또 없을 테죠 음~
슬픈 내 삶을 따뜻하게 해줄 참 고마운 사람입니다
그런 그대를 위해서 나의 심장쯤이야 얼마든 아파도 좋은데
사랑이란 그 말은 못해도 먼 곳에서 이렇게 바라만 보아도
모든 걸 줄 수 있어서 사랑할 수 있어서
난 슬퍼도 행복합니다

(이승철 노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가사 일부)

우신산업 대표이자 수필가이신 국중하님과 공숙자 수필가님, 조미애 시인도 병실을 찾아주셨다. 김남곤 시인께서는 “매실즙으로 버무린 취나물이 맛있었어요. 그 밥상에 함께 앉고 싶어요”라는 짧은 글을 주셨는데 울컥 눈물이 솟구쳤다. 항암 기간 동안에도 어르신들의 보살핌과 정성은 투병의 의지를 새롭게 해주셨다.

친구 인아는 매일 안부를 묻고 수시로 병원과 집을 드나들었다. 밥맛이 없다고 하면 김밥을 사 오고 고구마도 들여다 놓았다. 바쁜 시간 틈을 내어 반찬도 해두고 장도 봐왔다. 가장 큰 공덕은 점심때마다 함께 밥을 먹어줌으로써 꾸준히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는 것이다. 인아가 없었으면 상당히 많은 끼니를 걸렀을 것이다. 휴직 덕분에 인아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았다.

박영자 선배는 항암 후 구내염으로 고생한다는 얘기를 듣고 대나무 칫솔과 치약, 항암에 좋다는 생강차를 보내 주셨다. 양치질을 하면 피가 나서 칫솔이 벌겋게 물들어 맘이 편치 않았는데 검은색 대나무 칫솔은 그런 염려가 없어 정말 좋았다. 사소한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챙기는 그 마음을 배웠다.

큰 아들의 친구인 병욱이 어머니 박향희 님도 항암 기간에 더욱 가까워졌다. 병욱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공기 좋은 심심산골에 찾아가 몸에 좋다는 호두죽을 소개해주었다. 처음 먹은 호두죽이 정말 고소하고 맛있었다. 그런가 하면 날 위해 도자기 화병을 직접 만들어서 꽃까지 한 아름 꽂아 주고 가셨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빚은 그릇의 정성을 모르는 바 아니어서 화병에 담긴 병욱 어머니의 마음이 꽃향기로 오래오래 가슴에 남았다.

내 어린 친구 그림이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올해 중학교에 진학하는 그림이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내가 제작하는 방송에 고정 출연했던 인연이 있다. 그림이 엄마 아빠와도 친해서 가끔 연락하는 사이인데 그림이가 위문 메일을 보낸 것을 공교롭게 항암 하던 날 아침에 받아보았다.

김사은 선생님께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그림이예요.
선생님 많이 아프시지요 (뜨아)
선생님 빨리 나아서 저희 가게에 한번쯤은 오셔야지요.
선생님 꼭 OTL 하시면 안돼요.
꼭 건강하게 퇴원하셔야 해요

그림올림 힘내3 (아자아자 웃자 파이팅)

각종 이모티콘을 사용해서 그림이의 기지와 발랄함이 묻어나는 유쾌한 메일을 보고 울다가 웃다가 ‘웃픈’ 추억을 남겼다. 그날, 힘든 항암을 수월하게 마칠 수 있었던 것은 그림이의 메일 덕분이다.

▲ '나는 문제 없어'가 수록된 황규영의 1집

이 세상위엔 내가 있고 나를 사랑해 주는 나의 사람들과
나의 길을 가고 싶어
많이 힘들고 외로웠지 그건 연습일 뿐야
넘어지진 않을 거야 나는 문제없어
짧은 하루에 몇 번씩 같은 자리를 맴돌다
때론 어려운 시련에 나의 갈 곳을 잃어 가고
내가 꿈꾸던 사랑도 언제나 같은 자리야
시계추처럼 흔들린 나의 어릴 적 소망들도
그렇게 돌아보지 마 여기서 끝낼 수는 없잖아
나에겐 가고 싶은 길이 있어
너무 힘들고 외로워도 그건 연습일 뿐야
넘어지진 않을 거야 나는 문제없어

(황규영 노래 <나는 문제 없어> 가사)

각종 반찬과 과일, 몸에 좋다는 식품과 식재료를 가져다주고 옆에서 가슴을 졸이며 걱정하고 기도해준 많은 분들, 만난 적은 없지만 SNS를 통해 염려해주고 건강을 기원해준 분들, 나이 어린 친구부터 원로 선배님들까지 이렇게 많은 분들과 함께 한 시간은 투병鬪病 이란 단어를 쓰기도 송구할 정도다. 그냥 하루하루가 여행같다고나 할까. 어떤 날은 궂은 날씨에 힘들고 피곤하지만 어떤 날은 화창하고 쾌적한 날씨에 유쾌한 시간도 있었다. 게다가 항암 기간 중 전북여류문학상을 수상하는 기쁨도 있었다. 크고 작은 일들이 매번 그렇게 일상과 더불어 은혜를 빚는다. 내 삶에 갑자기 암癌 이 끼어들어 혼란과 불편함을 야기했지만, 나는 그로 인해 더 귀한 인연을 알았고 더 많은 것을 얻었다. 그러니 축복이다. 남진 노래 <빈잔> 가사 가운데 백미는 ‘어차피 인생은 빈 술잔 들고 취하는 것, 그대여 나머지 설움을 나의 빈 잔에 채워 주’라는 부분이다. 아, 누군가의 설움을 담아낼 빈 잔, 누군가의 고단함을 녹여주는 빈 의자, 그렇게 ‘누군가’에게 삶의 희망으로 살아가기를 감히 다짐하는, 새해 아침이다.

▲ ⓒpixabay

서 있는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 의자
당신의 자리가 되드리리다
피곤한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 의자
당신을 편히 쉬게 하리다
두 사람이 와도 괜찮소 세 사람이 와도 괜찮소
외로움에 지친 모든 사람들 무더기로 와도 괜찮소
서 있는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 의자
당신의 자리가 되드리리다

(장재남 노래 <빈 의자> 가사)

*필자는 대학졸업 후 신문기자를 거쳐 라디오 PD로 일하고 있다. PD로서 지역의 문화와 지역 발전을 위한 다수의 프로그램을 제작해서 이달의 PD상, 방송문화진흥회 공익프로그램 상 등을 수상했고, 수필가로서 전북여류문학회장 등의 활동을 펼쳤다. 저서로 '뽕짝이 내게로 온 날', '그리운 것은 멀리 있지 않다'가 있다. 전북수필문학상, 전북여류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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