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스 투 디 아메리카”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권성민PD의 끼적끼적]

랩탑 컴퓨터를 밀었다. 좀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포맷했다. 윈도우즈 10으로 업그레이드해도 모든 파일과 작업환경이 유지될 것이라는 MS의 사탕발림을 믿은 게 문제였다. 업그레이드가 끝나마자마자 그래픽카드가 호환이 안 된다며 랩탑 구매 이후로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블루스크린을 계속해서 만났고, 이것저것 해보다가 서비스센터까지 갔지만 결론은 포맷이었다. 중요한 파일들은 겨우 건졌지만, 결국 꽤 많은 소소한 추억이 영원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원래 사용하던 윈도우즈8로 돌아와, 지금도 수시로 ‘윈도우즈10으로 업그레이드하라’는 저 팝업창을 실수로라도 클릭하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다.

사실 상위버전으로의 업그레이드가 완벽하게 이루어지더라도 불편한 건 어쩔 수 없다. 별다른 선택권 없이 반강제로 이루어진 스마트폰 펌웨어의 업그레이드는 랩탑만큼 큰 문제는 없지만, 습관처럼 손가락이 가던 자리에 원래 있던 아이콘들이 사라지는 바람에 번번이 몇 차례씩 황망한 손가락을 더 움직이고 있다. 오랫동안 애정을 가지고 쓰던 블로그도, 대대적인 서비스 개편 이후에는 원래 쓰던 기능이니 인터페이스가 완전히 달라져버려 도무지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잘 적응해서 쓰고 있는데 왜 꼭 바꿔야 했을까. 물론 연말마다 파헤쳐지는 보도블럭처럼 불필요한 변화도 많겠지만, 아마 대부분은 꼭 바꿔야하는 경우들일게다.

내가 유독 관성에 약한 사람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꽤 많은 사람들에게 변화는 항상 불편한 것이다. 익숙한 것일수록 더욱 그렇다. 단지 먼저 양산됐다는 이유만으로 훨씬 효율이 좋은 다른 자판을 사장시킨 저 유명한 쿼티 자판 같은 사례는 그리 힘들이지 않아도 줄줄이 찾아낼 수 있다. ‘그렇게 해온 것, 익숙해진 것’은 그 자체로 다른 명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처음 그 자리에 자리 잡았을 때는 존재했던 이유들이 휘발된 지 오래여도 일단 자리를 잡았으면 그걸로 됐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려면 같은 출발선에서 달려 나갈 때보다 몇 배의 ‘이유’들을 필요로 한다.

전역을 코앞에 둔 군 복무 말엽, 미군위문단체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주최가 주최이니만큼 행사에 참석하는 이들 대부분은 주한미군들이었고, 각 부대에서 온 국군 병사가 조금, 그리고 유엔군 소속의 군인들도 한 줌 정도 동행했다. 당연히 행사는 영어로 진행되었고, 우리를 안내하는 코디네이터는 연배에 비해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어느 노인이었다. 주최가 미군위문단체였으니, 그도 역시 이 단체 소속이거나 모종의 연을 지닌 이였을테다. 추측은 금방 확신이 되었다. 그는 서울의 어디를 가든 무엇을 소개하든, 항상 모든 문장을 “땡스 투 디 아메리카”로 시작했는데, 미군이 대다수인 고객을 고려한 서비스 정신이라고 보기에도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곧 직접 그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손에 거두어 키워진 전쟁고아였다. 이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위문단체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해온 모양이었다. 당연히 이 노인에게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땡스 투 디 아메리카”일 수 밖에 없었다.

ⓒpixabay

그에게는 “땡스 투 디 아메리카”가 아닌 모든 말은 사실이기 힘들 것이다. 군사주권, 민주주의, 국제정세를 둘러싼 모든 복잡한 이야기들은, 전쟁터에서 내밀어진 단 하나의 손길 앞에 한낱 공허한 울림일 뿐이다. “땡스 투 디 아메리카”는 그의 삶을 지배한 단 하나의 문장이다. 그는 반백년이 넘도록 그렇게 살아왔고, 적어도 그의 삶에 있어서 흔들릴 수 없는 단 하나의 진실이다. 이것은 설득의 영역이 아니다.

정부 정책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모이는 곳마다 참으로 성실하게 나타나는 이들이 있다. 주로 군복을 입고 등장하는 ‘어버이’들에 이어서, 최근에는 ‘어머니’를 자처하는 이들까지 등장했다.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그 때마다 다르다. FTA타결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위안부 협상 타결에는 분노한 이들도 있을 것이고, 세월호 사건에는 마음이 아파 거리로 나왔지만, 정부의 노동법안 개혁에는 무덤덤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마다 나타나 이들을 ‘혼내는’ 이들의 이름은 매번 같은 이름을 달고 나온다. 그토록 부지런할 수가 없다. 흔히 시위 현장을 폄하하기 위해 등장하는 ‘전문 시위꾼’이라는 타이틀은, 누구보다 이들에게 가장 먼저 내어드려야 할 것 같다.

물론 목소리를 낼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 목소리가 어디를 향하든 광장은 열려있어야 한다. 다만 사람들이 함께 모여 내는 목소리는, ‘함께 모여야 맞설 수 있는 더 큰 힘’을 향할 때 진정 그 가치가 드러난다. 이들의 성실한 등장이 불편한 이유는, 그 성난 목소리가 한결같이 ‘피해자들’을 향한다는 점이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이들이 남은 힘을 애써 모아 내는 목소리를, ‘어버이’와 ‘어머니’를 자처하며 나서 짓누르기 위해 등장한다는 점이다. ‘꾸짖음’ 외에는 이렇다 할 논리도 이유도 없는 그 목소리를 마주할 때마다, 인간성에 대한 절망스런 회의를 느끼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규탄 기자회견에서 어버이연합 회원들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어버이연합은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에 위안부 문제 사과를 받아냈지만 정대협이 굴욕적 협상이라고 선동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뉴스1

그러나 여전히 이것은 설득의 영역이 아닌 것 같다. 신념은 부딪히고 깎이고 설득할 수 있지만 개인의 인생사, 그 속에 쌓인 역사는 그 모습 그대로 사실이기 때문이다. 먹물냄새 나는 민주주의라는 이름보다, 일면식도 없는 타인의 고통보다, 당장 오늘 저녁 찬거리가 그대로 실존의 문제였던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는 그 모습이 그대로 역사다. 다른 곳, 다른 현장, 내가 목도하지 못한 곳에서 벌어진 역사는, 언론이 다루어주지 않아서 알 수 없었던 역사는, 내가 살았던 삶 앞에서 그대로 허상이 된다. 그러니 “네가 역사에 대해, 국가에 대해 뭘 아냐”며 근엄하게 꾸짖는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이들 앞에서 역사에 대해, 국가에 대해 얘기하고자 할 때는 이것을 안고가야 한다. 그들이 부둥켜안고 놓지 않으려는 것을 일단은, 그대로 손에 쥔 채 이쪽을 봐달라고 해야 한다. 변화는 늘 불편한 법이다. 스마트폰 펌웨어가 업그레이드 된 이후로 자꾸 엉뚱한 곳을 누를 때 마다 내가 느끼는 짜증은, 이들이 거리에 모인 사람들을 볼 때 느끼는 짜증에 비할 바가 아닌 것만큼은 분명하다. 어찌해야 할까. 막막할 따름이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