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겠다”는 말 속에 담긴 방문진의 무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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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녹취록 공개 열흘 지나 녹취록 찾아보자?

“나는 사실 (녹취록) 내용을 잘 모르고 있다. 언론에서 다 보도됐다고 하는데 접하지 못했다. 내용 자체가 공식 석상에서 하는 건지 아니면 사석에서 나눈 이야기인지 자체도 잘 모른다. 그리고 이게 공식 석상에서 이야기 같으면 괜찮겠지만 사석에서 식사하며 농담 삼아 한 걸 가지고 (논의를) 하면 그 자체가 문제지 않겠나. 뭘 알아야 이야기를 하지 그렇지 않은 상태에선 회의를 진행하기 무리다.”

다른 곳도 아닌 MBC의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이사장 고영주)의 한 이사의 발언이다. MBC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가 담긴 ‘녹취록’이 세간에 알려진 지도 열흘 하고도 하루(4일 기준)가 됐지만 이 이사는 “(이번 일에 대해)모르겠다”고 말했다. 공영방송MBC를 관리・감독해야 할 책임이 있는 방문진 이사가 말이다.

지난 1월 25일 언론을 통해 처음 공개된 녹취록의 파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녹취록 당사자에 대한 해임 촉구는 물론 경영진에 '배임죄'를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증거 없이 PD와 기자를 해고하고 시사프로그램에 경영진이 개입하는 것은 물론 MBC 내부 정보를 외부 매체에 제공하겠다는 이른바 ‘파이프라인 구축’ 이야기, 라디오는 빨갱이라는 내용 등이 거침없이 녹취록에 담겨있다. MBC 고위 간부에게서 터져 나온 이야기들은 MBC 내부가 어떻게 통제되고 있는지 말하고 있었다.

▲ MBC 대주주 방송문화진흥회. ⓒPD저널

파문이 확산되자 방문진 야당 추천 이사 3인은 ‘백종문 본부장 녹취록에 기재된 사실관계에 대한 진상규명 및 향후 방문진 조치에 관한 건’을 제출하고 4일 정기 이사회에서 녹취록 사태에 대해 방문진이 앞으로 어떻게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해나갈지를 논의하자고 했다.

그러나 이날 회의 마무리는 여당 추천 이사들이 ‘일단 녹취록을 입수한 뒤 논의해보자’고 주장하며 지지부진하게 끝맺음 됐다. “내용 자체를 모른다”, “편향 내지 의도를 가진 쪽에서 보도됐다”, “녹취록이 없으니, 어떤 맥락에서 말한 것인지, 회사의 조직적인 부정행위를 스스로 자백한 건지, 술 한 잔 마시고 개인적 호기를 부린 건지 판단할 정보가 있어야 한다” 등이 그 이유였다. 이에 방문진은 녹취록 입수 후 이에 대해 검토한 뒤 오는 18일 정기 이사회에서 재논의하기로 했다. 물론 재논의의 전제는 ‘녹취록 입수’다.

물론 녹취록 전문을 입수해 과연 그 안에 어떠한 내용이 담겨 있으며, 누가 어떤 발언을 했는지, 해당 발언이 어떠한 맥락에서 나왔는지 등에 대해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진상규명과 향후 조치를 위해서는 이 같은 절차는 당연히 이뤄져야 한다.

문제는 이 사건이 그만큼 중대한 사안이라면, 편향적 매체를 통해서 보도됐기에 믿을 수 없다면 방문진이 먼저 나서서 해당 녹취록을 입수하고 어떤 경위에서 녹취록 속 모임이 이뤄졌는지 등에 대한 사태 파악에 나섰어야 했다는 점이다. MBC도 이미 지난 1월 26일과 29일 두 차례에 걸쳐 공식입장을 발표했다. 보도 속 녹취록의 짜깁기 여부가 의심된다고 했다면, MBC에 대한 관리・감독 책임이 있는 방문진이라면 이에 대한 조치가 이미 이뤄졌어야 한다.

그럼에도, 녹취록이 공개된 지 열흘이 지난 시점까지도 “모르겠다”, “이완기 이사(야당 추천 이사)가 구해서 달라”라고 하는 것이 과연 책임 있는 기구의 ‘공적 책임’을 진 이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말인지 의문이 든다. 녹취록을 몰랐다는 말은 책임을 몰랐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방문진 이사’라는 자리는 책임이 무거운 자리다. 방문진의 설립 목적에는 ‘민영’이나 ‘사영’, ‘국영’을 위한 책임이 아닌 ‘공영’, ‘공공’에 대한 책임을 실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공영’과 ‘공공’이라 함은 개인과 특정 계층이 아닌 ‘국민’을 위하라는 뜻이다. 이쯤에서 방송문화진흥회법 제1조에 있는 방문진의 목적을 기억 속에서 되살려보자.

“이 법은 방송문화진흥회를 설립하여 방송문화진흥회가 최다출자자(最多出資者)인 방송사업자의 공적 책임을 실현하고, 민주적이며 공정하고 건전한 방송문화의 진흥과 공공복지 향상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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