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해설 어딨니? “우리도 응팔 ‘듣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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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해설 어딨니? “우리도 응팔 ‘듣고’ 싶어요”
[진단] 화면해설방송 편성 의무화 ‘속빈강정’
  • 이혜승 기자
  • 승인 2016.02.19 11: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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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삼이 한 손에 술병을 들고 산속 언덕에 올라 주위를 둘러본다. 봉삼은 가쁜 숨을 내쉬며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다가 멈춰 서서 먼 곳을 바라본다. 길소개가 무덤 앞에 깔린 돗자리에 꿇어앉아 있다. 봉삼이 그곳으로 다가간다.”

KBS 2TV <장사의 신-객주> 35회 화면해설방송의 도입부다. 본방송에서는 대사 없이 배경음악만 깔린다. 화면해설방송이 없었다면 시각장애인들은 드라마를 보면서도 무슨 상황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을 거다. 

화면해설방송은 시각장애인을 위해 출연자의 행동, 의상, 몸짓, 표정, 특정 장면의 분위기, 상황 변화 등을 내레이션으로 설명하는 방송이다. 국내에는 2000년에 처음 소개되어 꼬박 11년의 노력 끝에 2011년 방송법으로 제도화되었다. 이에 따라 2015년부터는 지역을 포함한 전체 지상파 방송사는 전체 편성의 10%를 화면해설방송으로 편성해야 한다. 올해부터는 종합편성채널이 지상파와 동일한 10%의 의무편성비율을 맞춰야 한다. CJ헬로비전, 현대HCN 등의 69개 SO(종합유선방송사업자)와 CJ E&M, SBS플러스 등의 32개 PP(방송채널사용사업자)는 각각 7%와 5%의 비율로 화면해설방송을 의무적으로 편성해야 한다.

하지만 편성시간대와 프로그램 장르, 실태조사방법 등이 세부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다 보니 아직까지 실효성이 낮은 게 현실이다. 여전히 시각장애인 10명 중 9명은 화면해설방송이 아닌 일반방송을 볼 수밖에 없는 답답한 상황이다.

▲ 전문 성우가 화면해설방송에 들어갈 내레이션을 녹음하고 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그 시간에 누가 TV 봐요?”…99%의 화면해설방송은 주 시청시간대를 벗어나

① 20대 시각장애인 A씨의 사례를 보자. A씨는 2016년 1월만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한다. 하지만 보고 싶었던 <응답하라 1988>을 결국 화면해설방송으로 볼 수 없었다. A씨는 출근을 위해 오전 8시에 집을 나서 오후 7시에나 돌아오는데, ‘응팔’의 화면해설방송은 오전 8시나 잠을 자는 새벽 1시에만 나오기 때문이다. <무한도전>도 화면해설로 보고 싶지만 ‘리얼 버라이어티’ 예능의 화면해설방송은 서비스되지 않아 꿈도 못 꾼다. 결국 답답해도 더 재미있는 일반방송을 택한다.

이처럼 화면해설방송의 99%는 주 시청시간대(19시-23시)를 벗어난 시간에 편성되고 있는 현실이다. 사전제작을 하지 않는 한국의 방송 시스템상 본방송 후에야 화면해설방송을 제작할 수 있기 때문에 재방송 시간대에만 화면해설방송이 나가고 있다. 프로그램 장르도 편중되어 있다. 2015년 한국장애인재단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드라마와 다큐멘터리가 전체 화면해설방송의 60%를 차지하고, 나머지 40% 안에서 생활정보, 문화예술, 버라이어티, 영화, 애니메이션, 외화 등이 편성되고 있었다. 

이렇다 보니 실제로 2014년 전남대학교의 표본조사 연구 결과 90% 이상의 시각장애인이 화면해설방송이 아닌 일반방송을 본다고 응답했다. 그중 70% 이상이 화면해설방송을 보지 않는 이유로 ‘방영되는 프로그램이 적어서’, ‘원하는 시간대에 방송되지 않아서’라고 답했다. 지역 지상파로 의무편성이 확대된 2015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시각장애인 단체의 의견이다.

▲ 화면해설방송 시각장애인 모니터요원단이 간담회를 하고 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IPTV 업체, “화면해설방송이 뭐에요?”…VOD 서비스는 전무

② 60대 시각장애인 B씨는 홀로 집에서 보내는 유일한 여가 생활이 TV 시청이지만 일부 채널의 화면해설방송이 아예 나오지 않는다. 케이블 업체에 문의했지만 ‘화면해설방송이 뭐냐’는 답변만 돌아왔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에 연락해 작년 4월부터 방송통신위원회와 각 업체에 정정요청을 했지만 9개월째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방송사가 화면해설방송을 편성했다 하더라도 일부 지역의 케이블TV와 IPTV에서는 화면해설서비스가 누락된 채 방송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방송사의 송출 문제인지 SO의 송출 문제인지, 어떤 지역의 어떤 SO에서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지 실태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관련법 제8조에서 ‘방송사업자 및 인터넷멀티미디어 방송콘텐츠사업자는 장애인방송 신호 또는 내용이 누락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이에 관한 강제 조항이 없을뿐더러 실태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조치를 취할 수가 없다.

방송통신위원회에 해당 사실을 문의했으나 담당자는 “모든 방송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 하기는 어려워 샘플 조사만 하고 있다. 플랫폼의 송출 문제는 민원 제기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며 “앞으로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해명하는 데 그쳤다.

‘재방송 본방사수’가 힘들면 VOD 서비스를 이용하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방송사들이 저작권과 비용을 문제로 화면해설방송의 다시보기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 현재 IPTV와 N스크린 서비스의 VOD에 대한 화면해설방송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수신료를 받는 EBS와 KBS만이 장애인 전용 홈페이지에서 의무 편성을 위해 제작했던 프로그램에 한해 화면해설방송을 제공하고 있다. 한편 영국은 장애인들이 다양한 기기를 통해 방송을 접할 수 있도록 ‘VOD의 장애인방송서비스 의무화’를 추진하고 있다.

▲ 화면해설방송, 자막방송, 수화방송 등의 장애인방송 의무편성 실적 달성에 대한 KBS 뉴스 ⓒ화면캡쳐

한국, 10% 의무만 준수하면 하던 드라마도 편성 중단…영국은 30% 초과 달성

결과적으로 양적인 기준만 있을 뿐 질적인 부분에 대한 세부규정이 전혀 없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황덕경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미디어접근센터 센터장은 “이러한 폐단은 세부규정을 제정하지 않았던 2011년에 이미 예견되었다”며 법적 장치의 미비점을 지적했다.

이런 현실은 장애인방송 관련법 등 장애인의 정보 접근권이 제도적으로 잘 보장된 선진국과 확연하게 비교된다. 영국은 ‘화면해설 제작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내용적인 부분에서도 엄정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프랑스는 장애인방송 관련 기관들을 ‘화면해설헌장’에 서명하게 하여 관리감독을 철저히 하고 있으며, ‘프라임타임’ 시간대의 편성비율과 프로그램 장르의 다양성에 대한 세부규정을 따로 가지고 있다. 미국 역시 분기별로 최소 50시간 이상의 화면해설방송을 ‘주 시청시간대’와 어린이프로그램에 제공해야 한다는 세부규정이 있다.

특히 한국은 방송사업자들 사이에서 장애인방송의 필요성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이 공유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제도 개선이 뒤따라야 한다. 영국의 화면해설방송 의무편성비율은 10%로 한국과 똑같지만, 공영방송 BBC는 물론 민영방송사인 ITV를 포함한 다수의 채널이 20~30%의 편성비율을 보인다. 반면 한국은 의무편성비율 10%를 채우고 나면 방영 중이던 드라마도 중단해 버린다. 공영방송 KBS마저 드라마 <총리와 나> 방영 당시 전체 17회 중 8회를 결방했다.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장애인방송을 만들 뿐, 장애인 시청자의 시청권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일부 종편과 케이블 방송사는 비용을 문제로 화면해설 전문작가가 아닌, 시각장애인의 사고와 언어 체계에 대해 한 번도 교육받지 않은 일반 방송작가에게 화면해설 대본을 맡기고 있다. 이렇게 법의 허술함 뒤에서 벌어지는 관행들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제도 개선이 선행되어야 한다.

우선 방송사뿐만 아니라 플랫폼 사업자와 화면해설 제작업체에 대한 최소한의 실태 파악을 시작으로, ‘화면해설 제작가이드라인’을 포함한 세부규정 마련이 필요하다는 게 시각장애인들의 주장이다. 또 당장 사전제작을 통한 본방송 편성이 어렵다면, 인터넷 웹페이지를 통한 다시보기 환경을 구축해서 TV는 물론 모바일로도 원하는 시간에, 보고 싶은 장르의 프로그램을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해외 선진국과 국내의 장애인방송 운영제도 비교 연구'를 진행했던 주정민 전남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프로그램의 다양성과 VOD 문제는 결국 비용 때문”이라며 “전반적으로 방송통신위원회가 좀 더 많은 방송발전기금을 지원해야 비용과 인력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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