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에서 피는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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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은 PD의 뽕짝이 내게로 온 날]

몇 달 사이 책이 부쩍 늘어나서 일부 책을 정리하기로 했다. 보고 싶은 책을 선택해서 주문하거나 산 것은 그만큼 애정이 있고, 내 글이 실린 문예지나 저자가 직접 사인해서 보내주신 책도 있어 선별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사연 없는 책이 없다. 이번에는 15∼20년 사이 오래 된 책은 미련 없이 버리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먹고 있던 차, 어머니가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는 아저씨가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인데, 요즘 폐지를 줍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바람에 정작 아저씨가 가져갈 몫이 줄어 빈 차로 나갈 때가 많아 속상해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

재활용 쓰레기를 수거해 가는 아저씨를 제대로 본 적은 없었으나 쓰레기를 싣고 가는 트럭의 뒷 꽁무니를 바라보며 고마운 마음에 작은 선물이라도 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었다. 어머니 말씀을 듣고 보니 폐지를 내다 버리지 말고 아저씨에게 직접 전해드리는 것이 도움이 될까 싶었다.

어느 날 주차를 하다가 마침 아저씨를 만나게 되어 몇시 쯤 오시는지 확인을 했더니 하루에 세 번 정도 들른다고 하셨다. “저희 집이 5층인데요, 제가 정리 좀 하려고 해요. 책을 계단 옆에 내다놓을 테니 가져가실래요?” 라고 물었더니 고맙다고 하시면서 흔쾌히 그러겠다고 하신다.

주말을 맞아 책을 네 박스쯤 모아 두고 아저씨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하필 전날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연신 비오는 창밖을 내다보며 아저씨를 기다렸다. 드디어 트럭이 아파트 앞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책을 쓰레기장에 내다 놓으면 비에 젖을 것 같아 현관 앞에 책을 쌓아두고 아저씨를 기다렸다. 아저씨는 녹슨 카트를 끌고 5층으로 올라오셨다. 책 박스를 가져가시라고 말씀드리는 순간, 나는 속으로 크게 당황했다. 아저씨는 다리만 불편한 게 아니었다. 오른 손도 쓰지 못하는 상태로 책 박스를 두 손으로 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몸이 불편한 분을 5층까지 올라오시라고 했으니 미안하기도 하고, 게다가 무거운 책 박스는 어떻게 트럭까지 나를까 싶어서 암담하기까지 했다.

폐지를 다른 사람이 가져갈까 싶어서 아저씨에게 직접 전해드린 다는 것이 오히려 난감한 상황이 된 것이다. 아저씨는 혼자 힘으로 책 박스를 들어 카트에 실을 수가 없다. 아저씨의 왼 팔과 힘을 합해 낡은 카트에 두 박스를 힘겹게 실어드렸다. 트럭까지 옮겨드릴지 여쭈었더니 괜찮다고 하시면서 엘리베이터를 타신다. 걱정이 되어 베란다로 나가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아저씨는 왼쪽 팔로 책을 한권 또 한권 트럭으로 옮기고 있었다. 마치 슬로비디오를 보는 것 같다. 아직도 많은 분량의 책이 박스에 남아있는 상태다. 그런데 야속한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있다. 마음이 급해 반도 차지 않은 음식물 쓰레기를 들고 1층으로 내려갔다. 음식물을 버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저씨와 함께 책을 트럭에 옮기기 시작했다. 한쪽 구석에 쌓여 있는 책도 트럭에 실으실 것이냐고 물었더니 아저씨가 황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뇨, 그 책은요, 제가 보고 싶어서 따로 빼놓은 책입니다.”

아저씨의 분리수거가 늦어진 것은, 몸이 불편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권 씩 살펴보면서 나름 분류를 하고 계셨던 것이다.

아저씨가 ‘보고 싶어서 따로 빼놓은’ 책은 <사미인곡>, <토정비결>같은 책이었다. 출판된 지 오래됐지만 다행히 책의 상태는 양호했다. 쓰레기로 내 놓은 짐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보고 싶은 책’이 되었으므로 나는 책의 ‘환생’에 크게 안도했다.

다시 태어난 것 같아요! 내 모든 게 다 달라졌어요
그대 만난 후로 난 새 사람이 됐어요
우리 어머니가 젤 놀라요
우선 아침 일찍 깨어나 그대가 권해주던 음악틀죠
뭔지 잘 몰라도 난 그 음악이 좋아요
제목도 외우기 힘든 그 노래
할 때도 안된 샤워를 하며 그 멜로딜 따라해요
늘 힘들었던 나의 아침이 이렇게 즐거울 수 있나요?
오 놀라워라 그대 향한 내 마음
오 새로워라 처음 보는 내 모습
매일 이렇다면 모진 이 세상도
참 살아갈만 할 거에요

(윤종신 노래 / <환생> 가사 일부)

그 아저씨가 왜 하필 사미인곡과 토정비결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책을 보고 싶었다”는 아저씨의 말이 가슴에 꽂혀서 또 한번 민망하고 무렴해졌다. 책에 대한 반가움과 간절함과 소유의 충만한 기쁨이 새삼 느껴졌다.

나는 얼마나 간절하게 책 한권 읽기를 소망했던가! 나는 얼마나 애틋하게 책 한권 소장하기를 희망했던가! 나는 얼마나 살뜰하게 책 한권의 가치를 챙기고 그 감동을 누렸을까!

회한과 반성이 가슴속에서 요동친다. 아저씨에게 낡은 책은, 더 이상 폐지가 아니라 기쁨이자 행복한 조우였다. 문득 성자처럼 살다간 권정생 선생의 일화가 떠오른다. 권정생 선생은 일본의 가난한 고물상 집 아들로 태어났다고 했던가. 그의 아버지가 폐지를 수집하다가 찢어진 동화책을 아들에게 주었다고 했지. 쓰레기 더미에서 건진 동화책 읽기가 어린 권정생에게 큰 기쁨이었다고. 그 책들이 훗날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권정생 선생의 문학 스승이자 고귀한 선물인 것이다. 쓰레기 더미에서 건져 올린 그 책들이…….

이 세상 어디에 서 있을지라도
그대가 있으니 슬프지 않네
눈이 녹은 자리에 꽃이 피어도
그대 없는 그 계절은 봄이 아니네
온갖 새들 찾아와 노래를 불러도
그대가 없으면 꿈도 없겠네
행복이 가득찬 나의 인생은
그대가 전해준 고귀한 선물

(장은아 노래 / <고귀한 선물> 가사 중)

상생자원의 그 아저씨는 반쪽의 몸으로 여전히 폐지를 나르고 재활용품을 수거해간다. 나는 오다가다 쓰레기장을 살피곤 하는데 폐지 같은 재활용품이 많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또한 눈치껏, 아저씨가 쓰레기장을 방문할 시간을 맞춰 폐지를 내어 둔다. 어머니에게 전해 듣기로 어느 날은 아저씨 대신 아들이 다녀갔다고 했다. 건장한 아들이 아버지를 돕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그 아들은 어떤 책을 좋아할지 상상해본다. 혹시 그 취향을 살짝 알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진 책을 다수 폐지로 위장해서 내놓아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

새벽에 일어나 어두컴컴한 길을 걸어가보세
흠- 구둣방 할아버지 벌써 일어나
일판 벌려 놓았네 흠- 밤새 하늘에선
별들이 잔치 벌였나 어느 초라한 길목엔
버려진 달빛 고였나 희뿌연 바람이 헤진
옷새로 스며들어 오는데 흠- 해말간
새벽길 맨발로 걸어 가봐도 좋겠네
흠- 예배당 종소리 깔린 어둠을 몰아가듯
울리네 흠- 밤새 하늘에선 별들이
잔치 벌였나 어느 초라한 길목엔 버려진
달빛 고였나 희뿌연 바람이 헤진
옷새로 스며들어 오는데 흠-

(김정호 노래 / <새벽길> 가사)

아저씨네 트럭은 오늘 새벽에도 부릉부릉 아파트를 누빈다. 밤 새 어떤 희망이 피어났을지 알 수 없지만 차곡차곡 더 많이 쌓여가기를 기도하고 있다.

▲ 김사은 전북원음방송 PD

*필자는 대학졸업 후 신문기자를 거쳐 라디오 PD로 일하고 있다. PD로서 지역의 문화와 지역 발전을 위한 다수의 프로그램을 제작해서 이달의 PD상, 방송문화진흥회 공익프로그램 상 등을 수상했고, 수필가로서 전북여류문학회장 등의 활동을 펼쳤다. 저서로 '뽕짝이 내게로 온 날', '그리운 것은 멀리 있지 않다'가 있다. 전북수필문학상, 전북여류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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