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떠나지 말아요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사은 PD의 뽕짝이 내게로 온 날]

나는 그를 남우세스럽게 ‘오빠’라 부른 적도 없고, ‘오빠’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그의 노래를 듣기 위해 돈 내고 표를 산적도 없으며,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과 땀내와 목이 쉬도록 외쳐대는 관중들의 함성과 그 속에서 꿈틀거리는 열정과 생명력 따위를 공유하고 싶지 않아서 그의 공연장을 드나든 적도 없다. 가끔 TV 중계를 통해 관객이 공연자와 교감을 나누기 위해 무대 가까이 진출해서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 대체 왜 이성을 잃고 광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는.

내가 제대로 그와 교감하게 된 것은 대학 졸업 후, 직장관계로 서울의 먼 친척 집에 머물렀을 때의 일이다.

제법 잘 사는 중산층에 속했던 친척 집에는 성능이 좋은 전축이 있었고, 그 옆에 영화 <아마데우스>의 삽입곡이었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LP 음반과, 그의 음반이 눈에 띄었다. 감수성 짙은 친척 집의 고교 1학년인 남자아이는 한창 아마데우스와 그에게 빠져 있는 중이었다.

대학 시절에는 나도 장학금으로 산 미니 컴포넌트를 소유하고 있었다. 애정목록 1호인 모차르트의 교향곡 40번, 41번이 수록된 LP를 비롯한 수십여 장의 클래식과 팝송, 샹송, 가요 등의 앨범을 소장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와는 인연이 닿지 않았던가 보다. 라디오에서 그의 노래를 그냥 흘려듣는 정도였을까? 어쨌든 그렇게 친척 집에서 고등학생의 애청곡을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귀에 쏙쏙 안기는 가사와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지는 노랫말, 그리고 호소력 짙은 노래까지. 어느 가을날 오후, 햇살이 길게 늘어진 거실에 그렇게 그의 노래가 가슴속으로 흘러들었다.

▲ 이문세 5집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밑 정동 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가슴깊이 그리워지면
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밑 정동 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이문세 노래 / <광화문 연가> 가사)

그때까지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본 적도 없고, 언덕 밑 정동 길을 가본 적이 없었지만, 그의 노래는 곧바로 나의 역사가 되고 나의 추억이 되었다. 그래서 아직 어리고 때가 덜 묻었을 젊은 날의 나와, 가상의 어느 아름다운 사람과 팔짱을 끼고 덕수궁 돌담길도 걷고 눈이 덮인 조그만 교회당의 십자가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한 기도를 했던 것 같은, 그런 환상에 빠지게 되었다. 사랑을 잃고 광화문 네거리를 서성거리는 가슴 시린 아픔까지 왜 전이되어 오는 걸까. 광화문은 이문세의 노래가 살아있어서 괜히 아프다.

이문세 5집 킹레코드의 뒷면에는 이 노래도 실려 있었다.

라일락 꽃향기 맡으면 잊을 수 없는 기억에
햇살 가득 눈부신 슬픔 안고 버스 창가에 기대 우네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떠가는 듯 그대 모습
어느 찬비 흩날린 가을 오면 아침 찬바람에 지우지
이렇게도 아름다운 세상 잊지 않으리 내가 사랑한 얘기
우 우 우 여위어 가는 가로수 그늘 밑 그 향기 더하는데
우 우 우 아름다운 세상 너는 알았지 내가 사랑한 모습
우 우 우 저 별이 지는 가로수 하늘 밑 그 향기 더하는데

(이문세 노래 / <가로수 그늘아래 서면> 가사)

어느 늦은 가을, 그렇게 그와 ‘제대로’ 만났다.

왜 많은 사람이 그에게 열광하는지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고향으로 돌아와 지역신문 기자로 취직하고, 그 후 방송 PD로 일하는 중에도 그의 공연을 라이브로 볼 기회는 없었다. 그러나 방송 진행을 하는 중에도 이문세의 인기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고른 사랑을 받음을 실감하곤 했다. 그의 노래는 가장 많은 신청이 쏟아지는 ‘리퀘스트’ 중의 하나였다.

방송을 제작하면서 이문세의 노래를 분석하자면, 중년의 남성이 좋아하는 노래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 단연 많고 ‘파랑새’ ‘나는 아직 모르잖아요’도 인기다. ‘그녀의 웃음소리뿐’은 신청 빈도가 높지만 6분 30초가 넘는 까닭에 쉽게 선곡은 못 하고, 대신 주말에 편안하게 감상할 기회로 미뤄지곤 했다. 여성들은 더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발라드를 찾는다. 가을 초입에는 어김없이 ‘가을이 오면’을 찾고 그밖에 ‘옛사랑’, ‘사랑이 지나가면’, ‘이별 이야기’, ‘깊은 밤을 날아서’, ‘시를 위한 시’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등, 많은 노래가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다. 발칙한 여자들 OST ‘알 수 없는 인생’도 매일같이 신청이 이어지곤 했다.

최근에 드디어 라이브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모 은행에서 고객을 위한 음악회를 마련했는데 VIP 일행으로 초청을 받는 행운을 누렸다. 최고의 연주자들을 무대에 세워서 아낌없는 무대효과와 질 높은 공연으로 감동을 주었다. 그날의 피날레는 이문세의 무대였다.

‘휘파람’을 부르며 첫 무대를 연 그는 ‘소녀’로 분위기를 이어갔다.

▲ 이문세 3집 ‘난 아직 모르잖아요’

내 곁에만 머물러요 떠나면 안돼요
그리움 두고 머나먼 길 그대 무지개를
찾아올 순 없어요
노을 진 창가에 앉아
멀리 떠가는 구름을 보면
찾고 싶은 옛 생각들 하늘에 그려요
음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속에
그대 외로워 울지만
나 항상 그대 곁에 머물겠어요
떠나지 않아요

(이문세 노래 / <소녀>)

“나 항상 그대 곁에 머물겠어요. 떠나지 않아요.”라고 했을 때 나는 눈물이 났다. 질풍노도의 스무 살, 내 앞에 펼쳐질 인생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앞을 가리던 20대 중반, 혈혈단신 서울에 입성하여 온몸으로 부딪쳐야 했던 현실의 높은 벽 앞에서 좌절하고 낙담했던 그 시절이, 돌아보면 온통 상처뿐이었던 것 같은 젊은 날의 초상이 이문세의 노래 속에 되살아났다. 그런데 그런 세월을 다 뛰어넘어 그는 내 곁에 머물겠다고 한다. 떠나지 않을 거라고 한다. 가시지 않는 갈증 같은 20대의 타는 목마름이, 그의 노래로 크게 위무 받고 위안을 받았다. 그날, 이문세의 살아있는 공연으로.

‘20대의 고뇌하던’ 나는 이제 편안하게 인생을 관망하는 쉰두 살이 되었다. 낼모레 회갑을 바라보는 ‘그’는 여전한 입담을 과시하며 30여 년 전과 변함없이 땀을 뻘뻘 흘리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무대를 누빈다. 무대 아래에서 누군가 손수건을 건넸고 그는 “서울은 티슈 주던데, 전주는 손수건을 주시네요. 서울보다 인심이 좋아요.”라며 또 한 번 웃음을 선사했다. 아, 저렇게 열심히 관객을 위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데, 나라도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주고 싶었을 것이다. 관객이란, 팬이란 이런 거구나. 나를 위해 감동을 선사해주는 ‘그’를 위해 그와 함께 웃고 울며 땀을 닦아주고 싶은 마음인 거로구나. 나는 처음으로 순수한 팬의 입장이 되었다.

고맙게도 그는 변함없이 “나 항상 그대 곁에 머물겠어요. 떠나지 않아요.”라고 약속한다. 칠순을 지나 여든 살이 되어서도, 노래만 할 수 있다면 그는 “나 항상 그대 곁에 머물겠어요. 떠나지 않아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믿는다.

새삼 ‘노래’의 미덕을 생각해본다. 누군가 이렇게 좋은 노래를 만들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해 주는지, 참으로 그 공덕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 ‘노래’들을 매개로 청취자들과 교감할 수 있는 라디오 피디는 참 멋진 직업이다. 그 많은 노래 가운데 이문세! 그가 있어서 정말 고맙고 행복하다.

▲ 이문세 1집 ‘나는 행복한 사람’

그대 사랑하는 난 행복한 사람
잊혀질 땐 잊혀진대도
그대 사랑 받는 난 행복한 사람
떠나갈 땐 떠나간대도
어두운 창가에 앉아 창밖을 보다가
그대를 생각해 보면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
이 세상에 그 누가 부러울까요
나는 지금 행복하니까

(이문세 노래 / <나는 행복한 사람> 가사)

 

▲ 김사은 전북원음방송 PD

필자는 대학졸업 후 신문기자를 거쳐 라디오 PD로 일하고 있다. PD로서 지역의 문화와 지역 발전을 위한 다수의 프로그램을 제작해서 이달의 PD상, 방송문화진흥회 공익프로그램 상 등을 수상했고, 수필가로서 전북여류문학회장 등의 활동을 펼쳤다. 저서로 『뽕짝이 내게로 온 날』, 『그리운 것은 멀리 있지 않다』가 있다. 전북수필문학상, 전북여류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