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억, 영원에 머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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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억, 영원에 머물다
[리뷰] 연극 ‘비극의 일인자’
  • 이상연 tbs PD
  • 승인 2016.11.18 16: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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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평행선이 있다. 선 위에는 사람이 서 있다.
연인이다. 그들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또 하나의 선이 놓인다. 이번에는 양 끝단에 사람이 서 있다.
사랑했던 사이다. 둘은 유리벽에 가로막혀 다가 설 수 없다.

시간의 유한함, 그리고 인간의 본원적 외로움에 대한 배우들의 외침은 예리한 칼이 되어 관객의 심장을 향한다. 그리고 아픔은 끝없는 추락을 거쳐 심해(深海)의 터널을 지나 수면 위로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낸다. 작가는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과 기억에 대한 거침없는 담론을 시작한다.

2016 대한민국, 그리고 비극

▲ 연극 '비극의 일인자' ⓒ극단 피오르

비극(悲劇)은 인생의 잔인한 고통과 슬픔을 드러낸다. 그리고 우리는 비극을 통해 현실을 직시(直視)하고 인정하며, 그 속에서 일말의 희망을 추구한다. 카타르시스(catharsis)를 통한 심적 회복 또한 비극의 진정한 가치일 것이다.

비극이 상연(上演)되는 극장을 벗어난 우리의 삶을 바라본다. 2016년 대한민국에 있어 과연‘비극’의 효용(效用)이 존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른바 ‘헬조선’으로 드러난 우리의 현실 자체가 지극히 비극의 본질에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

마냥 행복해야만 할 어린 생명들이 ‘세월’ 속에서 심해(深海)로 사라졌다. 피로 이뤄낸 민주주의의 가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사악함에 오염되었다. 상실과 혼돈의 상처는 그 피 흘림이 너무도 크다. 이미 현실의‘지옥’을 살아가는 아픈 세대의 관념 속 ‘비극’은 그 의미가 무색하다.

비극적 결함, 그리고 죽음

주인공은 비극 작가이다. 그가 비극을 쓰는 이유는 거창한 대작을 쓰기 위함이다. 대작을 통해 권위(權威)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주인공의 비극적 결함(tragic flaw)이다. 그는 꿈을 꾼다. 그리고 그의 꿈은 ‘꿈속의 꿈’으로 실현된다. 자신을 생명(生命)을 소각하여 그가 얻은 것은 ‘상실’이다. 권위를 얻고 사랑을 지속하기 위한 그의 바람은 이제 현실을 벗어난다. 그는 그토록 갈망하는 사랑을 평행선 위에서 마주한다. 그 한 걸음의 거리는 평행한 기차 레일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을 그는 바라볼 수밖에 없다.

비극이 완성은 ‘죽음’이던가. ‘죽은 자는 불행하다’는 가설은 미안하지만 이성으로 검증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리고, 작가는 그 판단을 관객의 몫으로 남겨둔다. 현실의 비극을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관객들에게 말이다. 잔인하다. 그러나, 그 잔인한 현실 속에는 분명 ‘사랑’의 흔적이 희망으로 남아있다.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사랑의 기억 말이다.

연극 '비극의 일인자'

▲ 연극 '비극의 일인자' ⓒ극단 피오르

창작극 <비극의 일인자>는 이번이 세 번째 상연(上演)이다. 하지만, 이번 공연의 주연을 맡은 배우 김태훈의 해석과 연기는 이전 공연과 차별화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의 실제 인생이 짊어진 고단함과 상처가 진한 공명과 반향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고독한 예술가. 그 고뇌와 애절함은 배우 김태훈에 있어 사실적 절규였던 것이다.

아내의 역을 담담히 소화해 낸 배우 주수정. 첫 사랑의 설렘을 무대 가득 흩뿌린 배우 장우정. 주인공들의 젊은 시절을 역동적으로 표현해 낸 배우 노창균, 김나미의 연기 또한 부족함을 지적하기 어렵다.

그렇게 대학로 극단 피오르의 배우들은 우리의 비극적 삶을 견뎌내기 위한 비극의 정수(精髓)를 준비한 것이었다. 바로 영원(永遠)에 머무르는 사랑의 기억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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