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400년의 여행⑦] 이탈리아 : 비발디 ‘사계’와 협주곡의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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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을 2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헌재의 탄핵 판결과 벚꽃 대선을 가슴 조이며 기다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연일 쏟아지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뉴스를 보느라 피곤하다는 사람도 꽤 있지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2월, 분노와 지친 마음을 잠깐 내려놓고 마음을 다독여 줄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 고전 시대, 낭만 시대를 거쳐 우리 시대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며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으로 이 힘든 시기를 헤쳐나갈 활력을 조금이나마 충전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 글을 통해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면 간접적으로나마 프로그램 제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본문에 원어로 병기한 작곡가 이름과 곡 제목을 유투브 검색어로 활용하면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⑦ 이탈리아 : 비발디 <사계>와 협주곡의 진화

 

1683년, 오스만 투르크의 빈 포위 공격은 실패했다. 유럽을 이슬람 세계로 만들겠다는 술탄의 오랜 야망은 물거품이 됐다. 빈 사람들은 이들이 놓고 간 커피에 우유를 타서 달달하게 마셨는데, 여기서 ‘비엔나 커피’가 유래했다. 투르크 병사들이 즐기던 초승달 모양의 빵 ‘크로아상’도 유럽에 전해졌다. 술탄 근위병인 예니체리의 음악은 유럽 음악가들의 이국 취향을 자극했고, 약 100년 뒤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과 오페라 <후궁에서 구출하기>에 영향을 주었다.

 

이탈리아로 시선을 돌려 보자. 자유의 도시 베네치아는, 경제는 예전 같지 않았지만 문화 예술은 여전히 번창했다. 베네치아는 여전히 유럽 음악의 중심이었고, 산마르코 광장은 12월이면 카르나발(Carnaval, 사육제)을 즐기는 인파로 붐볐다. 1631년 몬테베르디가 산마르코 성당의 음악감독에 취임하여 <포페아의 대관식> 등 새로운 오페라를 발표했다. 1637년 산 카시아노 극장이 문을 열어 귀족 뿐 아니라 대중들도 오페라를 즐길 수 있게 됐고, 17세기 말까지 베네치아의 17개 극장에서 388편의 오페라가 상연됐다. 로마와 나폴리에도 오페라 극장이 잇따라 들어섰고, 화려한 기교를 뽐내는 카스트라토(castrato, 거세된 남성 성악가)가 대중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요즘 음악 용어가 이탈리라말로 돼 있는 건, 중요한 음악의 혁신이 이 시기 이탈리아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1703년, 25살의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가 사제 서품을 받았다. ‘빨강 머리의 신부’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는 미사보다 음악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미사 중에 신도들에게 기도를 시키고 그 틈을 타서 곡을 쓰곤 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베껴 쓰는 것보다 내가 작곡하는 속도가 더 빠르다”며 의기양양했다. 동시대의 법률가이자 극작가 골도니는 이런 그를 헐뜯었다. “비발디는 바이올리니스트서는 만점, 작곡가로서는 그저그런 편, 사제로서는 빵점이다.” 비발디의 순발력도 뒤지지 않았다. “골도니는 험담가로는 만점, 작가로는 그저그런 편, 법률가로는 빵점이다.” 비발디는 기관지 천식이 심해서 미사 집전이 힘들었다. 카톨릭 당국은 그를 곱게 보지 않았다. 사제가 된지 4년이 채 안 돼 종교재판소는 비발디의 미사 집전을 금지해 버렸는데, 그는 “음악에 몰두할 수 있게 됐다”며 오히려 기뻐했다고 한다.

 

18세기 유럽에서 비발디의 인기는 바흐와 헨델을 능가했다. 바흐는 비발디의 악보를 보면서 작곡을 연습했고, 무려 17곡에 이르는 그의 협주곡을 편곡했다. 누구나 아는 <사계>(1725)는 봄 · 여름 · 가을 · 겨울 네 계절의 정취를 담은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화성과 창의의 시도’ Op.8에 포함된 12곡 중 맨 앞의 네 곡으로, 비발디 자신이 계절마다 시를 써 넣었다. “소네트에 의해 매우 사실적으로, 명확하게 묘사된” 이 작품은 ‘표제음악의 효시’로 꼽히기도 한다. 비발디는 바이올린 뿐 아니라 첼로, 플루트, 만돌린 등 여러 악기를 위해 500곡 가까운 넘는 협주곡을 썼다.

 

비발디 <사계> (바이올린 율리아 피셔) 바로보기

 

당시 베네치아는 남녀 간의 풍기문란이 심했던 모양이다. 피에타 자선원은 문 앞에 버려진 사생아를 900명 가량 수용했는데, 이들 중 엄선한 40명 가량의 소녀들이 비발디의 협주곡을 세상에서 제일 먼저 연주했다. 이 불우한 소녀들 중에는 애꾸도 있고 천연두로 망가진 얼굴도 있었지만 “천사처럼 노래했고, 어떤 악기도 두려움 없이 척척 연주했으며,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우아하고 정확하게 박자를 맞추었다.” 비발디는 이 소녀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쳤고, 이들이 연주할 수 있도록 비교적 쉽게 곡을 썼다. 이들에게는 음악을 연습하고 연주하러 가는 시간이야말로 햇살을 보는 해방과 기쁨의 시간이었고, 비발디의 음악이야말로 새로운 삶을 꿈꾸게 해 주는 축복이었을 것이다.

 

비발디는 <글로리아>를 비롯한 150여 편의 종교음악과 90여 편의 오페라도 썼는데, 실종된 그의 악보들은 지금도 계속 발굴되고 있다. 그는 1741년, 만토바 출신의 소프라노 안나 지로와 함께 오페라를 공연하려고 빈을 방문했지만, 후원을 기대했던 카를 6세가 세상을 떠나자 쓸쓸히 객지에서 생을 마쳤다. 비발디의 이름은 사후에 완전히 잊혀졌지만, 19세기의 ‘바흐 르네상스’ 이후 그에게 영향을 준 중요한 음악가로 새롭게 평가됐다.

 

20세기 작곡가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는 이러한 비발디가 과대평가됐다며 “똑같은 협주곡을 400번이나 쓴 사람”이라고 폄하했다. 서양에서는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을 가리켜 “그에게는 모든 음악이 다 똑같다”고 우스개를 던진다. 그렇다면 <사계>를 듣고 네 곡의 차이를 알아채는 사람은 비발디를 이해하는 셈이지만 그렇지 못한 스트라빈스키는 비발디를 이해하지 못 했다는 결론 아닌가! 물론, 이 말은 우스개다. 1913년 <봄의 제전>으로 샹젤리제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음악의 혁명아 스트라빈스키가 볼 때, 길이 10분 안팎의 비발디 협주곡들이 모두 고만고만해 보인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스트라빈스키의 이 말이 비발디를 정당하게 평가한 거라고 볼 수 있을까? 먼저, 비발디 협주곡이 탄생하기까지의 역사를 잠깐 돌아볼 필요가 있다.

 

‘협주곡’(concerto)은 ‘겨루다’, ‘다투다’란 뜻의 ‘콘체르타레’(concertare)에서 온 말로, 독주 악기가 합주단과 대결하는 구성이다. 독창과 합창의 대조가 두드러지는 르네상스 말기의 노래 양식에서 협주곡이 싹텄다. 조반니 가브리엘리(Giovanni Gabrielli, 1554~1612)가 1587년 펴낸 <협주곡집>(concerti)은 기존의 교회음악이나 마드리갈과 다른, 기악 반주의 성악곡이었다. 이 작품은 ‘협주곡’이란 명칭을 사용한 첫 사례로 꼽힌다. 17세기 이탈리아 사교모임에서 연주하던 성악곡 ‘칸타타’(cantata)에서 기악 협주곡이 나왔다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Alessandro Scarlatti,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아버지, 1660~1725)는 600여 곡의 칸타타를 남겼는데, 대부분 소프라노(concerto delle donne)와 작은 합주단을 위한 아리아였다. 이 칸타타에서 소프라노가 맡은 역할을 바이올린이 대신하면 자연스레 협주곡이 되었고, 비발디는 이 점에 착안하여 수많은 협주곡을 작곡했다.

 

다양한 조바꿈 기법과 ‘리토르넬로’ 형식을 활용한 것은 비발디 협주곡의 특징이었다. 17세기 전반, 지금과 같은 조성 체계가 확립되어 중세의 선법(mode)을 대체했다. 작곡가들은 확고한 조성의 바탕 위에서 조를 바꿈으로써 변화와 대조의 묘미를 부각시킬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아리아들은 주로 A-B-A의 ‘다 카포’(Da capo, ‘처음부터’란 뜻) 형식을 취했는데, 비발디는 이를 확장하여 A-B-A-C-A-D-A의 ‘리토르넬로’(Ritornello, ‘돌아온다’는 뜻) 형식을 완성했다. A부분의 합주가 되풀이 나오는 사이사이에 다양한 조성의 에피소드 B, C, D가 등장하여 음악이 자연스레 확장된 것이다. ‘리토르넬로’는 협주곡의 이상적인 형식으로 간주되어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까지 이어졌다. 이 시대 청중들은 ‘리토르넬로’ 형식으로 창작된 새로운 곡을 즐겁게 기다렸고, 비발디는 이 형식을 파괴할 특별한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몰랐을 리 없는 스트라빈스키가 20세기의 기준으로 비발디의 음악이 “모두 비슷하다”고 깎아내린 건 부당해 보인다. 스트라빈스키는 “(모차르트와 베토벤 이후의) 예술가들은 이미 남들이 말한 것을 자기 방식으로 다시 말할 수 있을 뿐”이라고 탄식한 바 있다. (이희경 <메트로폴리스의 소리들>, p.55) 끊임없이 자기만의 새로운 형식과 음악어법을 선보여야 하는 창조적 예술가의 고충을 토로한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문화도 변해 왔기 때문에, 바로크 시대와 20세기의 작곡, 연주, 수용 방식이 다른 건 당연한 일이다. 바로크 시대에 역동적으로 이뤄진 음악의 실험은 비발디의 협주곡에서 하나의 정점에 도달한 것이다.

 

비발디보다 한 세대 먼저 활약한 바이올린의 거장 아르칸젤로 코렐리(Archangelo Corelli, 1653~1713)를 빼놓을 수 없다. 볼로냐 출신으로 22살 때 로마에 정착한 그는 매우 검소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그는 귀족들에게 늘 공손했지만 음악가로서 자부심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날, 그가 연주하는데 한 손님이 옆 사람과 잡담을 시작하자 그는 바이올린을 놓고 객석에 가서 앉아 버렸다. 사람들이 이유를 묻자 코렐리는 “제 연주가 저 분들 대화를 방해하면 안 되니까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코렐리 <크리스마스> 협주곡 Op.6-8 (연주 프라이부르크 바로크 오케스트라) 바로보기

 

 

코렐리 <라 폴리아> 변주곡 (바이올린 헨릭 셰링) 바로보기

 

 

코렐리는 분명한 조성 위에서 균형 잡힌 선율과 프레이즈, 절제된 감정과 유머를 담아 60곡의 소나타와 12곡의 협주곡을 남겼다. 12곡씩 묶어서 출판된 그의 소나타 중 Op.1과 Op.3은 교회 소나타, Op.2과 Op.4는 실내 소나타로 분류되며, 대개 ‘느리게-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표준 구성을 취한다. Op.5의 12곡 중 마지막 곡 D단조는 포르투갈 춤곡 ‘라 폴리아’(La Follia)에 의한 30개의 변주곡으로, 한 악장으로 이뤄진 매혹적인 소나타다. 코렐리가 작곡한 12곡의 협주곡은 ‘독주 악기군’과 ‘합주 악기군’이 경합하는 ‘콘체르토 그로소’, 즉 합주 협주곡으로, 제8곡인 <크리스마스 협주곡>이 가장 유명하다. 그의 합주 협주곡은 헨델의 ‘콘체르토 그로소’와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에 영향을 미쳤고, 멀리 모차르트의 협주교향곡(Sinfonia Concertante), 베토벤의 삼중협주곡(Triple Concerto), 브람스의 이중협주곡(Double Concerto)까지 흔적을 남겼다.

 

코렐리와 비슷한 시기, 잘츠부르크 성당에서는 바이올린의 명인 이그나츠 비버(Ignaz Biber, 1644~1704)가 <신비 소나타>(Mystery Sonata) 등 독특한 작품 세계를 펼쳐 보였다. 바이올린 연주 테크닉은 계속 발전하여 타르티니(Giuseppe Tartini, 1692~1770)는 엄청난 난곡으로 꼽히는 소나타 <악마의 트릴>을 작곡했다. 그는 스무살을 갓 넘긴 1713년, 꿈에서 만난 악마의 무시무시한 연주를 듣고 이중 트릴과 삼중 트릴의 고난도 테크닉을 구사한 이 곡을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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