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400년의 여행⑧] 프랑스 ‘세상의 모든 아침’과 루이 14세의 궁정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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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 루이 14세 시대 궁정악장을 지낸 마랭 마레와 그의 스승 생트 콜롱브의 이야기를 담았다. ⓒ 영화 포스터

<클래식, 400년의 여행>을 2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헌재의 탄핵 판결과 벚꽃 대선을 가슴 조이며 기다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연일 쏟아지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뉴스를 보느라 피곤하다는 사람도 꽤 있지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2월, 분노와 지친 마음을 잠깐 내려놓고 마음을 다독여 줄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 고전 시대, 낭만 시대를 거쳐 우리 시대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며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으로 이 힘든 시기를 헤쳐나갈 활력을 조금이나마 충전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 글을 통해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면 간접적으로나마 프로그램 제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본문에 원어로 병기한 작곡가 이름과 곡 제목을 유투브 검색어로 활용하면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1991)에는 루이 14세의 궁정악장을 지낸 마랭 마레(1656~1728)의 젊은 시절 이야기가 나온다.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인 그는 비올 연주의 거장 생트 콜롱브의 제자가 된다. 세상을 등진 채 딸과 함께 은거 중인 콜롱브는 그에게 좀체 연주 비법을 전해 주지 않는다. 스승의 딸 마들렌의 사랑을 이용하여 스승의 모든 것을 몰래 습득한 그는 신뢰와 출세욕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결국 화려한 궁정음악의 세계를 향해 베르사유로 떠난다. 절망한 마들렌은 숨을 거두고, 홀로 남은 콜롱브는 세상에서 잊혀진다.

 

 

 

17세기 프랑스, 루이 14세(1638~1715)가 “짐은 곧 국가”라고 말한 그 시대의 풍경이다. 무려 72년간 ‘태양왕’으로 군림한 그는, 예술을 사랑했고 예술로 절대권력을 미화했다. 그는 15살 때인 1653년 <밤의 발레>에 직접 출연하여 ‘명예, 승리, 가치, 명성’을 상징하는 태양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음악을 맡은 사람은 14살 때 피렌체에서 건너 온 젊은 음악가 장 바티스트 륄리(Jean-Baptiste Lully, 1632~1687)였다.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에서 지팡이를 쾅쾅 내리찍으며 ‘터키 의례 행진곡’(Marche pour la Cérémonie des Turcs)을 지휘한 바로 그 사람이다. 루이 14세는 크게 만족하여 그를 궁정 작곡가로 임명한다. 륄리는 몰리에르(Jean-Baptiste Molière, 1622~1673) 등 당대의 작가들과 협력하여 코미디 발레(comédie ballet)라는 프랑스 특유의 무대 예술을 꽃피운다. ‘터키 의례 행진곡’이 나오는 <서민귀족>(Bourgeois Jentil'homme)은 귀족의 생활방식을 흉내 내는 졸부의 허영심과 속물근성을 풍자한 코미디 발레였다.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 중 륄리 작곡 <서민 귀족> ‘터키 의례 행진곡’ 장면 바로 보기

 

 

1661년, 20년의 공사 끝에 베르사유 궁전이 완성됐다. 프랑스 왕실은 소규모 앙상블인 실내음악단(Musique de la Chambre), 대규모 야외 음악을 맡은 큰 마굿간 음악단(Musique de la Grande Ecurie), 종교 음악을 담당하는 예배당 음악단(Musique de la Chapelle)을 운영했다. 륄리는 이 모두를 관장하는 왕실음악 총감독을 맡은 뒤 루이 14세를 흉내라도 내듯 음악의 절대군주로 군림했다. 왕립아카데미극장인 팔레 루아얄의 운영권을 손에 넣고 발레와 오페라의 공연권을 독점했다. 다른 작곡가들이 자신의 허가 없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면 1만 리브르의 벌금 등 혹독한 댓가를 치러야 했다. 자기 작품이 아니면 성악가 2명, 바이올린 연주자 2명을 넘지 못하게 했는데, 루이 14세의 권위를 상징하는 웅장한 음악은 자기에게만 허용된다는 논리였다. (조병선 <클래식 법정>, p.228~229) 그는 샤르팡티에(Marc-Antoine Charpentier, 1643~1704) 등 뛰어난 음악가의 앞날을 방해하며 혼자 특권을 누렸다. 영화에서 비올의 명인 생트 콜롱브가 음악계에 진출하지 않은 것은 이러한 륄리의 전횡 탓도 있지 않았을까.

 

루이 14세가 늙어서 더 이상 발레에 출연할 수 없게 되자 륄리는 작가 라신느(Jean-Baptiste Racine, 1639~1699)와 함께 서정 비극(tragedie lyrique)으로 위대한 국왕의 태평성대를 노래했다. 오페라 <아르미드>(Armide, 1686)를 국왕 앞에서 공연하기 전, 그는 이렇게 말했다. “폐하, 제가 작곡한 모든 비극 중 대중이 가장 만족스러워 한 작품입니다. 이렇게 많은 박수가 쏟아진 역사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폐하 앞에서 아직 한 번도 선보이지 못했기에 제 모든 작품 중 가장 아쉬움이 큰 작품이기도 합니다.” 루이 14세가 병상에서 회복한 것을 기념하는 <테 데움>(Te Deum, 1687)을 지휘하던 그는 커다란 지휘봉으로 자기 발등을 내리찍었고, 악성 종양이 퍼지기 전에 발가락을 잘라야 한다는 의사의 권유를 무시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륄리에게 음악은 생존 전략이자 출세 수단이었다. 세상의 모든 권력이 루이 14세에게 집중돼 있었기에 늘 새로운 작품으로 ‘태양왕’을 만족시켜야 살 수 있음을 간파했고, 또 실천했다. 예술에 안목이 있고 몸소 발레에 출연한 절대군주가 아낌없이 지원했기에 성공할 수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음악을 과소평가하면 곤란할 것이다. 그의 서정 비극은 영웅적인 주인공과 탄탄한 줄거리를 갖췄고, 무용과 합창이 어우러진 코미디 발레와 함께 프랑스 ‘그랑 오페라’*의 전통을 낳았다. 그가 개발한 프랑스식 서곡은 부점 리듬의 장중한 도입부와 푸가풍의 빠른 악장으로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화려한 그의 음악은 루이 14세의 절대권력과 베르사유의 영광에 잘 어울렸다. 이탈리아에 뒤쳐져 있던 프랑스 음악 수준을 향상시키겠다는 약속을 그는 어느 정도 지킨 셈이었다.

 

륄리에 이어 라모(Jean Philippe Rameau, 1683~1764)도 베르사유 궁전에서 코미디 발레와 서정 비극을 작곡했다. <우아한 인도>(Les Indes galantes, 1736)를 비롯한 그의 오페라는, 당시에는 ‘표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 할 정도로 인기와 논란을 몰고 다녔다. 그는 오케스트라에 클라리넷을 처음 사용했고, 베이스 선율 위의 음들을 체계적인 화음으로 처리했다. 그가 구사한 화음은 선배인 륄리의 것보다 더 풍요롭다는 평을 받았다. 1772년 발표한 <화성론>(Traité de l'harmonie)은 으뜸화음, 딸림화음, 버금딸림화음이 조성의 기둥이며, 이 화음들 사이에 기능적인 위계질서가 있다고 설명했다. 륄리 추종자들이 “화음이 괴상하고 어색하다”고 비난하자 그는 “음악에서 본능과 직관이 중요하다”며 맞섰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절대왕정에 봉사한 륄리와 큰 틀에서 궤를 같이 하고 있었다.

 

바로크 시대의 프랑스 기악은 차츰 세련되고 화사한 로코코 음악으로 변화했다. 음악은 심각할 필요가 없고, 향수 묻은 손수건처럼 사치스런 장식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지배했다. 당시 유행한 하프시코드와 류트 음악은 건축물이나 공예품처럼 장식이 많은, 화려한 모습이었다. 라모의 실내악 작품집 <합주용 클라브생 작품들>(Pièce de Clavecin en Concerts)는 18편의 우아한 작품으로, 하프시코드가 주로 활약한다. ‘수줍음’, ‘판토마임’ 등 재미있는 부제가 붙어있고, ‘라모’(La Rameaux)라는 곡도 눈에 띈다. 바이올린 음악에서는 루이 15세의 궁정 음악가 르클레르(Jean Marie Leclair, 1697~1764)가 눈에 띈다. 그는 프랑스 바이올린 악파의 창시자로, 코렐리의 연주 스타일을 이어받아 프랑스풍의 우아하고 부드러운 선율에 순수한 고전미를 결합시킨 바이올린 소나타를 남겼다.

 

라모 하프시코드 독주곡 <판토마임> 바로 보기

 

 

쿠프랭 하프시코드 작품집 (연주 스코트 로스) 바로 보기

 

 

유명한 음악가족의 일원으로 태어난 쿠프랭(François Couperin, 1668~1733)은 귀족 취향의 하프시코드(프랑스말로 클라브생) 음악을 썼다. 그는 음악이 인간의 행동이나 심리와 연결된다고 생각했다. 파반느는 고매함, 쿠랑트는 활발함, 사라방드는 서정적이며 유연한 성격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가 펴낸 4편의 하프시코드 곡집 중 1집의 첫 곡 <존경>(L'August)은 고상한 알레망드다. 루이 오귀스트(Louis August) 공작의 이름에서 따 왔지만 일반명사로 ‘존경’을 뜻하므로 이중의 의미가 있는 제목이다. (김춘미 <서양음악문화사 강의> p.167) 네 번째 곡집에 있는 <회색옷 입은 사람들의 행진>은 거지들 훌쩍이는 소리, 백파이프와 피리 소리, 곰과 원숭이 걸어가는 소리를 묘사했다. 음악 속에 인간이 들어있다고 확신한 결과였다. 쿠프랭은 바흐와 더불어 클라비어 연주에서 엄지손가락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으로 꼽힌다.

 

18세기, 절대왕정의 웅장한 음악과 귀족 취향의 화사한 음악을 즐기던 프랑스는 1789년 대혁명의 진앙지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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