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400년의 여행⑪] 갈랑 양식(1) 오페라 :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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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을 2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헌재의 탄핵 판결과 벚꽃 대선을 가슴 조이며 기다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연일 쏟아지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뉴스를 보느라 피곤하다는 사람도 꽤 있지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3월, 분노와 지친 마음을 잠깐 내려놓고 마음을 다독여 줄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 고전 시대, 낭만 시대를 거쳐 우리 시대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며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으로 이 힘든 시기를 헤쳐나갈 활력을 조금이나마 충전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 글을 통해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면 간접적으로나마 프로그램 제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본문에 원어로 병기한 작곡가 이름과 곡 제목을 유투브 검색어로 활용하면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은 최초이자 최대의 시민민주주의 혁명으로, 사실상 근대세계의 출발점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시민들은 자신의 힘으로 절대왕정을 무너뜨렸을 뿐 아니라 인간의 기본권을 옹호하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근대 민주주의 이념을 전면에 내세우게 됐다. 고전파, 특히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음악은 프랑스 혁명으로 대표되는 시대정신을 떠나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할 것이다.

 

당시 프랑스는 인구의 2%인 성직자와 귀족이 부의 98%를 독점하는 불공정한 체제였다. 미국 독립전쟁 지원으로 재정이 파탄나자 루이 16세는 삼부회(성직자, 귀족, 시민 대표회의)를 소집하여 조세 수입을 늘이려 했다. 귀족과 성직자는 시민들에게 조세 부담을 떠넘기려 했고, 이에 항의하는 시민 대표들을 아예 회의에서 배제해 버렸다. 격분한 시민 대표들은 인근 테니스 코트에 모여 동등한 투표권을 요구하며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시민 대표들은 자연스레 국민의회를 결성하여 혁명의 구심점이 됐고 마침내 7월 14일, 성난 민중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하여 혁명의 첫 걸음을 내딛었다. 프랑스 혁명은 잔인한 단두대의 숙청과 나폴레옹의 침략 전쟁을 거쳐 1848년 혁명과 1870년 파리 코뮌 등 19세기 내내 왕정 세력과 공화 세력 간의 거대한 충돌로 이어졌다. ‘자유, 평등, 우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은 민주와 정의를 향한 인류의 염원을 요약한 슬로건이 됐다.

 

 

시민들 뿐 아니라 수많은 귀족들이 혁명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 구체제의 모순 탓도 있지만, 계몽사상이 널리 확산돼 있기 때문이었다. 루소의 <사회계약>은 당시 지식인들의 필독서로 여겨졌다. 인간은 모두 동등하게 벌거벗고 태어났는데, 많은 이가 노예의 사슬에 묶인 채 허덕이고 있다면 이는 계약이 잘못됐기 때문이며, 신성한 인권을 보장하는 새로운 계약을 체결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계몽사상은 프랑스의 볼테르 · 루소, 독일의 헤르더 · 레싱 · 칸트 · 괴테 · 실러 등 지식인들 뿐 아니라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2세, 오스트리아의 요젭 2세,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등 일부 군주들도 공감한, 시대의 대세였다. 이러한 계몽사상은 음악에도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가져왔다.

 

그때까지의 모든 음악은 구체제의 틀 안에서 이뤄졌다. 음악가들은 영주와 성직자의 하인으로 작곡과 연주는 물론, 자잘한 관리 업무까지 도맡아야 했다. 교회음악, 극장음악, 실내음악의 전통적인 구분도 여전히 유효했다. 그러나 음악에서도 과거의 권위에 도전하는 새로운 시도가 널리 이뤄졌는데, 대표적인 흐름이 ‘갈랑 양식(Gallant Style)’이다. ‘갈랑’(Gallant)는 ‘구애한다’는 뜻에서 온 말로, 현학적인 음악보다 즐겁고 편안한 음악이 낫다는 견해에서 비롯됐다.

 

헨델의 라이벌이자 친구인 요한 마테존(Johann Mattheson, 1681~1764)은 가볍고 유쾌한 이탈리아 오페라의 새로운 흐름을 ‘갈랑’이라 부르며 “바흐의 양식이 훌륭하긴 하지만 너무 복잡하고 기교가 지나쳐 음악의 아름다움을 가린다”고 주장했다. 라이프치히에서 바흐의 음악을 늘 접하며 지낸 작곡가 샤이베(Johann Adolf Scheibe, 1708~1776)도 저서 <비판적인 음악가>에서 “이 새로운 양식이 바흐로 대표되는 옛 양식보다 훨씬 낫다”고 맞장구쳤다. 갈랑 양식의 대두는 갓 성장하기 시작한 시민 계급의 요구를 반영하고 있었다.

 

이러한 큰 흐름은 1728년 런던에서 존 게이의 <거리 오페라>가 헨델의 오페라 세리아를 압도했을 때 이미 감지됐지만, 프랑스의 ‘부퐁 논쟁’을 통해 본격적으로 표출됐다. 당시 프랑스 지배층은 루이 14세의 위대한 업적으로 프랑스 음악이 르네상스 유산을 이어받은 이탈리아를 능가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하지만, 이러한 자부심은 곧 이어질 ‘부퐁 논쟁’(Querelle des Bouffons)으로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이 논쟁에 불을 당긴 작품은 페르골레지의 오페라 <마님이 된 하녀>였다.

 

나폴리 출신의 페르골레지(Giovanni Battista Pergolesi, 1710~1736)는 26살의 짧은 생애를 살다 간 천재였다. 평민 출신인 그의 삶은 신비의 베일에 쌓여 있지만, 귀족 가문의 마리아 스피넬리와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건 사실로 보인다. 그의 대표작 <슬픔의 성모>(Stabat Mater, 1736)에 얽힌 사랑 이야기가 전해진다. 마리아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싹텄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마리아의 오빠들은 누이에게 ‘3일의 선택’을 강요한다. 귀족 출신인 미혼 남자의 초상화를 차례차례 보고 사흘 안에 신랑감을 정해야 하며, 이를 거부하면 엄벌에 처한다는 일종의 ‘명예살인’을 예고한 것이다.

 

마리아는 자신과 페르골레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수녀원행을 감행했고, 1년도 안된 1735년 3월,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아픔을 짊어진 채 눈을 감았다. 페르골레지는 마리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 무렵 폐결핵이 악화되어 포추올리의 수도원에서 요양을 시작했는데, 이 곡에 모든 열정을 쏟아 부은 결과 기력이 다하여 초연 다음날인 1736년 3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가슴 저미게 아름다운 <슬픔의 성모>에는 아들 예수를 먼저 보내는 어머니 마리아의 아픔 뿐 아니라, 마리아 스피넬리와의 못 다한 사랑의 그림자가 오롯이 담겨 있는 셈이다. (조병선 <클래식 법정> pp.368~374)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은 그의 오페라 <마님이 된 하녀>(La serva padrona, 1733)의 주제이기도 했다. 오페라 세리아의 막간극으로 공연된 이 작품은, 하녀 세르피나가 귀족인 주인 우베르토를 유혹하고, 속이고, 협박하여 결혼을 이룬다는 45분 길이의 희극이다. 하녀가 주인을, 그것도 여자가 남자를 쥐락펴락하는 내용에 시민들은 배꼽을 잡았고, 페르골레지의 발랄한 음악도 분위기를 잘 살렸다. 산카를로 극장을 중심으로 오페라가 활기를 띄고 있던 나폴리에서 이 작품은 꽤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페르골레지의 때이른 죽음과 함께 망각 속에 파묻히는 듯했다.

 

페르골레지가 세상을 떠나고 한참 지난 1752년, 이 작품이 파리를 뜨겁게 달구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흥행사 밤비니(Eustacchio Bambini)가 이끌던 ‘부퐁’(Bouffon) 극단이 <마님이 된 하녀>를 수입하여 파리에서 공연했다. 이 작품은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고, 재치이고 발랄한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opera buffa)는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 화제가 됐다. 하지만, 근엄한 음악에 길들여 있던 프랑스 상류층에게 이 작품은 문화적 충격이었다. 신분을 뛰어넘은 결혼은 근엄한 귀족들에게 불쾌감을 주었고, 남자 주인공이 우스꽝스런 베이스로 등장한 것도 당시 음악의 규칙을 무시한 일탈로 보였다. 륄리와 라모의 추종자들은 이 ‘천박한’ 이탈리아 희극을 맹렬히 비난했다.

 

루소(Jean Jacque Rousseau)를 비롯한 백과사전파 사상가들은 이에 맞서 륄리와 라모의 서정 비극을 공격했다. 특히, 루소는 <프랑스 음악에 대한 서간>(1753)에서 라모의 오페라 <이폴리트와 아리시>가 “화성은 조화롭지 못하고, 선율은 부자연스럽고, 음악의 흐름 또한 억지스럽다”며, “프랑스 음악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고 앞으로 가능하지도 않다”며 저주를 퍼부었다. ‘바로크’(Baroque, 일그러진 진주)란 표현이 처음 나온 게 바로 이 글이었다. 이 작품을 공연한 팀의 이름이 ‘어릿광대’란 뜻의 ‘부퐁’이었기 때문에 논쟁 이름도 ‘부퐁’이 됐다.

 

얼핏 보면 프랑스 오페라와 이탈리아 오페라의 우열을 가리는 음악 논쟁이지만, 사실은 프랑스 구체제를 옹호하는 보수파와 이를 비판하는 진보파로 입장이 나뉜 정치 싸움이었다. 양 진영이 실제 결투까지 벌이며 뜨겁게 가열된 논쟁은 1754년 부퐁 극단이 해체되고 추방되면서 막을 내렸다. 겉으로 보면 보수파의 승리였지만, 소탈하고 자연스런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중들이 더 호감을 갖게 됐으므로 진보파의 승리로 볼 여지도 있었다. 루소는 이 논쟁으로 당시의 정치 · 경제 · 사회 제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고, 직접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를 작곡하여 자기 이론을 입증하려 했다. 12살 모차르트의 독일어 징슈필 <바스티엥과 바스티엔느>는 이러한 루소의 영향을 보여준다. 부퐁 논쟁은 1789년의 대혁명으로 이어지는 긴 역사적 흐름의 한 매듭을 이루었고, 페르골레지의 <마님이 된 하녀>는 모차르트의 혁명적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 1786)의 씨앗이 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시민들은 “복잡한 기법에서 벗어나 민감한 관객이라면 누구든 즉각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음악”을 원하고 있었다. 라모는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추구하는 계몽시대 학자들의 열정을 음악으로 받아들여 과감하게 음악을 혁신한 사람이지만, 격변하는 시민의 요구에 부응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프랑스의 전통 오페라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를 만나서 ‘오페라 코미크’(Opéra Comique), 즉 프랑스식 희가극으로 발전했다.

 

독일 출신 작곡가 글루크(Christoph Willibald Gluck, 1714~1787)는 파리에서 또 한 번 오페라를 개혁했다. 그는 오페라에서 일체의 허세와 과장을 걷어내고 시와 음악을 드라마의 흐름에 복종시켜서 오페라의 질서를 다시 세우고자 했다. <알체스테>(Alcestes, 1767) 서문에 그는 이렇게 썼다. “무능한 가수들이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도입했거나 작곡가들이 자기만족에 취해 끌어들인 모든 악폐를 떨어내려 했다. 이 악폐들은 오랫동안 이탈리아 오페라를 일그러뜨렸고, 장엄하고 아름다운 스펙터클을 하찮고 바보스러운 것으로 바꿔놓았다. 음악을 쓸데없는 꾸밈음으로 망치지 않고 가사의 감정과 상황을 자연스레 표현할 수 있게 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피치니 등 기존 오페라를 옹호한 음악가들과 격한 충돌을 빚었지만, 결국 승부를 가른 것은 논쟁이 아니라 작품의 질이었다. 독일인 글루크는 1774년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Orphée et Euridice)와 <타우리드의 이피게니아>(Iphigénie en Tauride)를 팔레 루아얄에서 연이어 공연, 프랑스 오페라를 평정했다.

 

프랑스 혁명기에는 고세크(François-Joseph Gossec, 1734~1829)가 혁명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레퀴엠>(Requiem)을 지휘했고, <출정가>(Le chant du départ)로 혁명에 참여한 작곡가 메윌(Étienne Méhul, 1763~1817)이 나폴레옹의 후원으로 오페라를 발표했다. 이들의 작품은 프랑스 밖에서는 자주 연주되지 않지만, 19세기 낭만시대의 혁명아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1869)에게 영향을 미쳤다. 18세기 말~19세기 초, 파리에서는 베버의 <마탄의 사수>를 개작한 <로빈 후드>나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에 남의 음악을 섞어서 만든 싸구려 흥행물 <이시스의 신비>가 인기를 끌었고, 볼거리 위주의 ‘그랑 오페라’(Grand Opéra) 이외에는 이렇다 할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 19세기에 비제(George Bizet, 1838~1878)의 <카르멘>이 반짝 빛을 발했을 뿐, 프랑스 오페라는 독일과 이탈리아 오페라 앞에서 한 번도 빛을 발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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