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400년의 여행 ㉑] 비르튜오소의 시대, 리스트와 파가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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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400년의 여행>을 연재합니다. 대선을 앞둔 엄중한 시기, 공영방송 정상화와 언론 개혁의 중대한 과제에 매진해야 할 때지만, 때때로 음악과 함께 휴식과 힐링의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요?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 고전 시대, 낭만 시대를 거쳐 우리 시대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며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으로 조금이나마 활력을 충전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통해 클래식 음악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면 간접적으로나마 프로그램 제작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본문에 언급된 작곡가 이름과 곡 제목을 유투브에서 검색하면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19세기는 공공 음악회를 주름잡은 탁월한 기량의 비르튜오소(Virtuoso)가 대중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바이올린의 니콜로 파가니니(1782~1840)와 피아노의 프란츠 리스트(1811~1886)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비르튜오소였다. 베를리오즈가 이 두 사람과 맺은 인연도 흥미롭다.

 

파가니니는 초인적 기교와 괴상한 외모 때문에 ‘악마와 결탁한 바이올리니스트’란 별명을 얻었다. 그는 바이올린의 모든 테크닉을 자유자재로 구사했을 뿐 아니라 동물 소리를 내거나 한두 개의 줄로 연주하거나 악보를 거꾸로 놓고 연주하는 등 별난 행동으로 화제를 몰고 다녔다. 그는 6곡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치오> 등 바이올린 음악의 명작을 남겼다. 이 전설적인 천재가 베를리오즈에게 비올라 솔로가 포함된 관현악곡을 써 달라고 의뢰한 것이다. 이 요청에 따라 베를리오즈는 교향곡 <이탈리아의 해럴드>를 작곡했는데, 파가니니는 예상보다 솔로 부분이 적어서 실망을 표시했다. 베를리오즈는 “비올라 솔로를 많이 넣으려면 직접 작곡하셔야죠” 퉁명스레 응수했다. 두 사람은 불편한 관계가 될 뻔 했지만, 파가니니는 “죽은 베토벤을 되살릴 사람은 베를리오즈 뿐”이라며 무려 2만 프랑의 거액을 사례로 내놓았다.

 

파리에 살던 리스트는 1830년 12월 <환상> 교향곡 초연에 왔다. 이미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그는 무명 작곡가의 새 교향곡에 열렬히 갈채를 보내 모든 이의 눈길을 끌었다. 베를리오즈는 초면인 리스트에게 괴테의 <파우스트>를 권했는데, 리스트는 1854년 이 작품을 소재로 교향곡 <파우스트>를 쓰게 된다. 예술을 통해 인간의 완성을 추구한 두 사람은 <파우스트>에서 자신을 확인했고, 이 작품으로 우정의 끈을 맺은 것이다. 베를리오즈 부부가 빚에 허덕일 때 리스트는 쇼팽과 함께 음악회에 찬조출연, 개런티를 부부에게 주어 빚을 갚도록 했다. 리스트는 1852년과 1855년 바이마르에서 ‘베를리오즈 주간’을 개최하여 그의 음악을 널리 알렸다.

 

리스트의 삶에 큰 전환점을 만들어 준 사람은 파가니니였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주목받은 리스트는 빈에서 살리에리에게 작곡을, 체르니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1823년 빈의 레두텐잘에서 연주회 때는 베토벤이 무대에 올라가서 12살 리스트의 이마에 뽀뽀를 해 주었고, 그는 평생 이 사실을 자랑스레 회상했다. 20살 무렵 리스트는 연주자 생활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있었는데, 이 때 그에게 용기를 준 게 바로 파가니니였다. 리스트는 1832년 파가니니의 연주를 본 뒤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겠다고 결심했고, 실제로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됐다.

 

리스트의 화려한 연주는 청중들을 압도했다. 여성들이 그의 연주에 까무러치는 일은 흔한 풍경이었다. 그가 녹색 장갑을 낀 채 무대에 서면 여성들이 몰려와서 옷과 머리카락을 만지려 했고, 그가 마시던 홍차를 향수병에 담아 가거나 끊어진 피아노 줄을 집어가려고 다퉜다. 리스트 자신이 말했다. “나는 음악을 연주하는 게 아니라 연주회장을 연주한다.”

오늘날 ‘리사이틀’이라 부르는 피아노 독주회를 처음 연 사람이 리스트였다. 그때까지 음악회는 여러 음악가가 함께 출연하는 게 당연했지만 1840년 6월 9일, 런던의 하노버 스퀘어 홀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리스트는 혼자 무대에 올랐다. 역사상 최초의 피아노 ‘리사이틀’이었다. ‘리사이틀’이란 말은 성서를 낭송한다는 뜻이었는데, 피아노 연주회를 이렇게 부른 것에 청중들은 당황했다. 1839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혼자다. 내 음악회는 독백(soliloquy)이다.” 이듬해인 1840년 ‘독백’이란 단어를 버리고 사용한 게 바로 ‘리사이틀’이란 말이었다.

 

피아노를 옆으로 놓아 청중들이 피아니스트의 옆모습을 보도록 한 것도, 피아노 뚜껑에 반사된 소리가 청중들을 향해 가도록 한 것도, 피아니스트가 무대 측면에서 등장하도록 연출한 것도 리스트가 처음이었다. 리스트는 당연히 자기가 쓴 작품들을 연주했지만, 바흐부터 쇼팽까지 모든 피아노 레퍼토리를 무대에 올렸다. 오늘날의 리사이틀과 같은 선곡을 최초로 선보인 셈이다. 그는 이런 ‘리사이틀’을 1,000번 넘게 열었고, 이 ‘리사이틀’에는 3,000명이 넘는 청중이 몰리기도 했다. 리스트에 대한 팬들의 열광을 시인 하이네는 ‘리스트 열병’(Lisztomania)이라 불렀다.

 

그의 작품 중 12곡의 <초절 기교 연습곡>, 6곡의 <파가니니 연습곡>, 피아노 소나타 B단조는 섬뜩할 정도의 난곡이지만 <헝가리 광시곡>2번, 피아노 협주곡 Eb장조와 A장조는 친숙한 명곡이다. 리스트는 베토벤의 아홉 교향곡과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을 피아노로 편곡해서 연주, “오케스트라보다 더 오케스트라답다”는 평을 들었다. 이 ‘옮겨 쓰기(Transcription)’는 레코드가 없던 19세기에 레코드의 기능을 했다. 오케스트라 연주를 자주 듣기 어려웠던 시절, 리스트는 ‘옮겨 쓰기’를 통해 교향곡과 관현악곡을 집에서 즐길 수 있게 보급한 것이다. 그는 모차르트, 슈베르트, 파가니니, 슈만, 벨리니, 베르디의 작품들을 피아노 독주를 위해 재창조했다. ‘패러프레이즈(Paraphrase)’, 즉 ‘의역’은 편곡자의 환상이 허용될 뿐 아니라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에서 단순한 ‘옮겨 쓰기’와 다르다. 리스트의 ‘의역(Paraphrase)’ 작품들은 청중들을 즐겁게 했을 뿐 아니라, 동시대 작곡가의 음악을 널리 알리는 효과도 있었다.

 

리스트 <동 주앙의 추억> (피아노 랑랑) 바로 보기

 

 

리스트는 화려한 비르튜오소로 매니저를 데리고 다닌 최초의 연주자였지만, 너그럽고 쾌활했다. 부다페스트에 홍수가 났을 때 빈에서 베토벤 <전원> 교향곡과 <함머클라비어> 소나타를 연주, 24,000 플로린을 모아서 수재민 구호 성금으로 냈다. 이 금액은 개인이 낸 성금 중 가장 큰 액수였고, 이 일을 계기로 리스트는 헝가리의 국민 영웅이 됐다. 셀 수 없이 많은 리스트의 작품 중에는 러시아, 체코, 스페인, 영국 등 유럽 여러 나라들의 국가를 피아노로 편곡한 것도 있다. 연주하러 방문한 나라마다 국가를 연주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파리에서 쇼팽과 따뜻한 우정을 나누었는데, 두 사람은 연주 스타일이 너무 달라서 서로 비교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쇼팽은 리스트의 테크닉을 찬탄했지만, 그의 외향적인 스타일을 좋아하진 않았다. 쇼팽은 자신의 에튀드를 리스트가 멋대로 화려하게 연주하자 “그 따위로 칠 거면 차라리 안 치는 게 낫겠다”며 화를 냈다. 리스트는 당황했지만, 쇼팽이 직접 연주하는 걸 듣고서 “자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네” 한 걸음 물러섰다고 한다. 1849년 쇼팽이 사망하자 리스트는 이 고귀한 친구를 위해 기념비를 세웠고, 그의 삶과 음악에 대한 첫 전기를 썼다.

 

리스트는 1847년 키에프 연주회 때 만난 자인-비트겐슈타인(Sayn-Wittgenstein) 공작부인과 깊은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결혼하려 했지만,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방해로 실패했다. 공작부인이 러시아에 갖고 있던 영지가 너무 넓어서, 리스트와 결혼할 경우 영토가 줄어들 게 예상됐기 때문이었다. 니콜라이 1세는 리스트의 리사이틀에서 수다를 떨다가 리스트에게 면박을 당한 경험 때문에 개인적 앙금이 있었다고 한다. 리스트는 공작부인의 감화로 화려한 비르튜오소 생활을 청산하고 작곡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리스트는 결혼을 완전히 포기한 1861년 로마로 옮긴 뒤 가톨릭 성직자가 되어 만년을 보냈다.

그의 교향시 <전주곡>에는 라마르틴느의 시(詩)를 바탕으로 자인-비트겐슈타인 부인이 쓴 서문이 붙어 있다. “우리의 인생이란 죽음이 엄숙한 첫 음을 연주하는 미지의 찬가, 그 전주곡이 아니겠는가?” 교향시 <전주곡>은 깊은 굴절을 겪은 그의 인생 한가운데 자리한 기념비다. 문학과 음악의 융합은 낭만시대 음악이 중요한 특징이었다.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에서 자극받아 더욱 높은 문학성을 이룬 리스트의 13편의 교향시는 바그너의 초기 악극과 스메타나 · 시벨리우스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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